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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앞에 놓인 인왕산 안내도 / _IMG_2995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옥인아파트가 있던 자리의 수성동 계곡을 향해 가다보면 마을버스 종점 직전에 옥인제일교회가 나타난다. 가던 길을 따라 곧게 오르면 수성동 계곡을 거쳐 북악스카이웨이에 오르지만 오른편 경사로 방향을 틀면 불국사(佛國寺)가 있다. 서울에서 보기 힘든 대나무 밭이 인상적인 사찰인데, 인왕산 석굴암을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누구나 경주를 떠올리기 마련인 불국사와 석굴암이 인왕산에 함께 자리잡고 서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수성동 계곡을 지나면 북악스카이웨이 중간에 있는 경비초소 앞에서 길이 갈라지는데, 인왕산 정상을 포기하고 왼편 길을 향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석굴암 약수터'가 나온다. 북악스카이웨이 윗쪽으로 만수천, 인왕천과 함께 수성동 계곡의 상류를 이루는 약수터 중 하나이다.


석굴암 약수터에서 가파른 계단 300여개를 10분 남짓 오르면 계단 끝으로 석굴암이 나타난다. 오른편으로 거대한 바위가 얹혀있고, 그 바위 아랫틈으로 문이 나있는 것을 보면 깊은 산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던 바위틈의 암자가 이렇게 가까이 있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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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아래 콘크리트로 벽을 막아 입구를 낸 석굴암 / _IMG_3007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한자로 적힌 석굴암이라는 이름을 보고 새삼 뜻을 풀어보니 '바위굴 암자'라는 의미이다. 고유명사 보다는 일반명사 처럼 흔하게 쓰이는 이름이 아닐까 싶다. 아니나 다를까 검색을 해보니 석굴암이라는 이름의 암자는 경주 토함산은 물론, 양주 오봉산(북한산), 서울 도봉산, 제주 한라산에도 있었다.


주 출입구 반대편으로도 작은 출입구가 하나 더 있는데, 이 곳을 보면 인왕산 큰 바위들이 굴러 깨진 틈새에 자리잡고 있는 석굴암의 모양이 그대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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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뒷문 / _IMG_3011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사진을 찍던 날은 그 며칠 전 신교동 골목길에서 만난 아주머니가 새벽에 인왕산 석굴암에 가서 산꿩을 여러번 봤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산꿩을 만날까 나름 이른 시각에 올라본 것인데, 너무 늦은 탓인지 그 날은 산꿩이 내려오지 않은 탓인지 아쉽게도 산꿩을 보지는 못했다.


올라간 김에 이리저리 석굴암 주변을 돌아보다가 앞마당 철봉 옆의 길을 보고 접어들었다. 길이 작은 능선을 돌아굽더니 커다란 바위 틈 아래로 난 세모굴 너머로 물이 고여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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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향암 / _IMG_3030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입구에서부터 곳곳에 천향암(天香庵)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하늘천('天')의 첫 획이 왼쪽으로 기울어진 것이 이채로왔다.


물은 머리위 큰 바위를 타고 내려와 바위 끝으로 떨어져 바위 웅덩이에 고였다가 골짜기를 타고 흘러갔다. 촛불기도를 금하는 안내문 뒤로 팽개쳐진 경고문이 이 곳을 '석굴암약수터2'라고 불렀고, 수질은 그다지 좋은 편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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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된 약수터 폐쇄 안내문 / _IMG_3034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물이 떨어지는 바위는 바위끝 뿐만 아니라 그 아랫쪽으로도 습기가 가득하여 볕이 들지 않는 곳은 이끼가 가득끼어 있었다. 바위 전체를 타고 물이 나오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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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향암 바위 이끼 / _IMG_3045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세상을 피해 석굴암에 숨어든 이야기가 몇 전하는데, 아마도 이 곳이 그 은신처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깊숙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어느 서촌 토박이분으로부터 일제를 피해 명성황후가 몸을 숨긴 곳이 석굴암 근처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만약 사실이라면 이곳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의 발길은 잦았던 것 같다. 은신처가 발각된 후에 유명세를 탄 탓일수도 있겠다. 천향암에서 나오는 길에 입구 바위 안쪽으로 새겨진 바위글씨와 그림이 눈에 띠었다. 가늘고 섬세한 선으로 그려진 산의 윤곽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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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향암 입구 바위 안쪽의 바위그림 / _IMG_3051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숫자는 4283년 5월을 뜻하는 듯 했다. 단기 4283년이라면 서기로 1950년, 해방 후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고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의 것인 셈이다. 그러고보니 바위를 쪼아 새긴 글씨는 제법 흔한 것이어서 예전에는 무분별한 자연훼손이라고 하여 지탄을 받기도 했는데 이렇게 눈에 띤 것이 60년 전 낙서라고 생각하니 이것도 나름대로 질박하게 드러나는 옛 삶의 흔적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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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향암 입구에 걸린 시 / _IMG_3054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돌아나오는 길에 암벽 틈으로 걸린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신미년(辛未年)이라면 1991년으로 20년 전에 불과하지만, 인왕산 등산로가 일반에 개방된 것이 1993년이니 그 때만 해도 이 곳 천향암은 말그대로 고적한 은처였으리라. 가슴을 치는 명문은 아니어도 인왕산이라는 제목으로 7·5조의 시를 짓고 걸어둔 이야기는 또 어떤 것일지 궁금해진다.


인왕산


새벽공기한아름 가슴에안고

오백계단하나둘 약수터갈제

힘겨운맥박소리 구슬땀빚어

신성한천향수에 갈증을푸니

건강에비결일세 천약수라네


천향암옆을돌아 인왕을보니

절묘한암석들은 만물상인데

유순한인왕봉은 현모양처요

만상이신비스런 인왕산절경

경관이수려하여 명산이라네


석굴암독경소리 새벽이오면

경건한삼신불에 자애자비를

영험한삼신전에 속죄를빌며

저승의극락왕생 축원을하고

이승에만사형통 기원할거나


신미년 유월 이영원(李永元)


어제 아침에 산꿩 보러 석굴암에 올랐다가 천향암만 보고 내려오는 길에 수성동 계곡 접어들며 까치 한 마리를 만났다.


산책로 주변을 이리 저리 살피며 걷는 모양이 짙푸른 도포에 뒷짐지고 아침 산책 나선 영감같아 재밌다고 쫓아가며 찍는데 뒤는 내내 신경도 안쓰다가 맞은 편으로 북악스카이웨이 산책객을 보고는 후다닥 날아오른다.














MINIMAL - Matias Aguayo (DJ KOZE MIX, 2008)






album title :: reincarnations - The Remix Chapter 2001-2009

release :: 2009

artist :: DJ KOZE

label : GET PHYSICAL MUSIC


KOZE renowned as one of the world's best DJs and one of its most distinctive producers returns with his 2nd installment of notable remixes Including remixes of Matthew Dear, Battles, Lawrence, Nôze, Ben Watt a.o.


further infos []





[ DJ KOZE a.k.a Adolf Noise ]


INTERNATIONAL PONY with Erobique & Cosmic DJ


I'm just a little person
One person in a sea
Of many little people
Who are not aware of me

I do my little job
And live my little life
Eat my little meals
Miss my little kid and wife

And somewhere, maybe someday
Maybe somewhere far away
I'll find a second little person
Who will look at me and say

"I know you
You're the one I've waited for
Let's have some fun."

Life is precious every minute
And more precious with you in it
So let's have some fun

We'll take a road trip way out west
You're the one I like the best
I'm glad I've found you
Like hangin' 'round you
You're the one I like the best

Somewhere, maybe someday
Maybe somewhere far away
Somewhere, maybe someday
Maybe somewhere far away
Somewhere, maybe someday
Maybe somewhere far away

I'll meet a second little person
And we'll go out and play

나는 어떤 한 사람
너른 바다 가운데
무수한 사람의 바다
그 가운데 한 사람

내겐 할 일이 있어
내 작은 인생에
내 소박한 식사
아내와 아이를 그리지

언젠가 어디선가
저멀리 어디서라도
한 사람 만나겠지
나를 보고 말하는

"이제껏
너만을 기다려왔어
우리 함께해"

삶은 보석, 언제나
더한 보석, 함께라면
우리 함깨해

길을 떠나겠지, 서쪽으로
너만이 내 모든 것
널 만나 좋아
너와 함께여서
너만이 내 모든 것

언젠가 어디선가
저멀리 어디서라도
언젠가 어디선가
저멀리 어디서라도
언젠가 어디선가
저멀리 어디서라도

난 한 사람 만나겠지
그리고 늘 함께일거야


지난 7월 11일, 수성동 계곡 복원 준공식이 열렸다. 취재 카메라는 곳곳에서 돌아가고 현장을 소개하는 기자들은 바윗돌 사이를 겅중거리며 뛰어다녔다. 준공식을 앞둔 계곡 입구에는 의자마다 사람들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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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동 계곡 준공식 현장을 취재중인 KBS 카메라 / _IMG_0471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수성동 계곡은 물 흐르는 소리가 좋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평대군의 비해당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어느 위치에 어떤 모습인지는 전혀 확인된 바 없다. 다만 겸재 정선이 당시 '장동'이라 불리던 서촌 일대의 풍경을 그린 장동팔경첩 중 일경이 기린교가 놓인 수성동 계곡을 배경으로 한 까닭에 그 옛모습을 되짚어볼 수 있을 뿐이다.


지금은 수성동계곡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처음 옥인아파트 철거계획이 나올 당시에는 수성동 계곡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서울 용강·옥인동 시범아파트 철거 (뉴시스, 2007년 12월 7일)


옥인아파트 철거가 결정된 것은 지금 '윤동주 시인의 언덕' 자리에 있던 청운아파트가 철거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서울시는 1997년에 '시민아파트 정리계획'을, 2002년에 '노후 시민아파트 정리 특별대책'을 수립하는데, 옥인아파트는 그 다음 순서로 추진된 오세훈 서울시장의 르네상스 사업 중 내사산르네상스의 일환으로 철거가 결정된 것이다. 이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청계천 복원에 이어 청계천 상류를 복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도 고려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재미있는 것은 보도에도 나와있듯 노후한 건물 탓에 철거됐던 청운아파트와는 달리 옥인아파트는 인왕산 녹지의 일부를 침범하고 있는 것이 철거의 주된 이유였다. 역시 어디에서도 수성동 계곡이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인왕산 도시자연공원 추진이 전환을 맞게 된 것은 기린교의 발견이었다. 철거 계획이 나온지 2년이 다 되어가던 가을에 갑자기 옥인 아파트 옆 계곡에서 조선시대 돌다리가 발견됐다는 보도가 나온 것이다.




조선시대 돌다리 발견 (연합뉴스, 2009년 9월 14일)


보도 사진에서 보다 시피 다리 위로 시멘트가 덮이고 양 옆으로는 철제 난간이 박혀진 채 40년 가까이 잊혀져 있던 기린교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다리는 겸재 정선의  수성동 계곡 그림에 그려진 모양과 위치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고, 다음 해에 수성동 계곡을 복원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 하지만, 기린교임을 명백히 확인시켜주는 사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현재에도 기린교의 공식 명칭은 '돌다리'에 머물고 있다.)


옥인아파트 40년만에 철거, 수성동 계곡 살린다 (매일경제, 2010년 9월 15일)


촛점은 인왕산 녹지를 침범하고 있는 옥인아파트가 아니라, 수성동 계곡을 가리고 있는 옥인아파트로 옮겨갔다. 이와 함께 서울시는 수성동 계곡과 돌다리를 서울시기념물로 지정하는데, 수성동 계곡은 서울시 기념물 중 최초의 자연물이라는 기록을 얻게 된다. 그렇게 공원 조성사업은 문화재 복원사업으로 방향을 틀게 되고 공원과 문화재라는 다소 낯설은 조합 안에서 크고 작은 혼란이 발생하게 된다.


서울 사람이라도 인왕산과 북악산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인왕산 호랑이라는 말도 흔하고 청와대 뒷배경으로 우뚝 선 북악산도 화면을 통해 자주 접할 수 있지만 세종로에 서면 북악만 보일 뿐 인왕을 보기는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인왕이 숨겨진 산이 되어버린 데에는 광화문 바로 앞에 말의 눈가리개처럼 세워놓은 정부종합청사 건물도 톡톡히 한 몫 하고 있다.


지난 달 수성동 계곡이 복원사업을 마치고 일반에 개방되었으니 이 계곡을 오가며 인왕의 능선을 눈에 익힐 기회는 늘어난 셈이니 인왕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낯익게 다가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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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동 계곡 기린교 앞에서 바라본 인왕산 / _IMG_0478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수성동 계곡에서 올려다 본 모습에서는 인왕산 중에서도 정상을 이루고 있는 치마바위가 시야를 채우는데, 치마바위 바로 북쪽 골짜기는 너무나 가파라 치마바위 발치에 있는 석굴암에서 길이 끊긴다. 석굴암 오르는 길 바로 다음 계곡으로 만수천을 지나 북쪽 능선을 타고 정상에 이르는 길이 있는데, 서촌에서 인왕을 오르기에는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등산로가 된다.


다른 동네에서 등산 오는 분들은 등산복에 장비까지 채비를 잘 갖추고 오기도 하지만, 말하자면 서촌의 동네 뒷산이라고 할 수 있는 인왕산은 마음 내키면 샌들 신고 올라가도 충분한 산이다. 하지만 그 가파른 산길은 짧지만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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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정상에서 남쪽 능선을 따라 이어진 성곽길 / _IMG_2577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 사진 가운데 부분을 가로지르며 내려가는 짙은 골짜기가 인왕천이 있는 등산로이다.


지난 주말에는 만수천을 거쳐 정상에 올랐다가 성곽을 따라 사직단으로 내려오는 길 중간에서 왼쪽으로 길을 틀어 인왕천을 따라 내려와봤다. 만수천으로 오르는 길도 가파르다 했지만 인왕천 길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인왕천과 만수천 모두 수성동 계곡으로 흘러들지만 인왕천은 말 그대로 인왕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물줄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풍경도 바로 곁에 있는 다른 골짜기와 사뭇 다른 것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 수 없는 구멍이 뚫린 바위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되기도 하고, 가파른 골짜기 따라 비좁게 나있는 돌계단길도 인왕산 자연암을 깎아 계단으로 만든 구간이 훨씬 길게 분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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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천 골짜기에서 보이는 독특한 모양의 바위 / _IMG_2584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인왕산이라는 이름은 조선에 들어 붙여진 이름인데, 인왕사라는 절이 있다고 해서 인왕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 전에는 '서봉(西峰)' 혹은 '서산(西山)'이라 불리웠다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도 태종이 사직단 자리를 정하는 부분에서 인왕산을 서봉이라고 언급한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인왕산의 한자 표기는 仁王山 으로 주로 쓰이는데, 일제 시대에 가운데 임금 왕('王') 자를 일본의 왕을 뜻하는 성할 왕('旺')으로 조작하였다 하여 성할 왕을 피해 仁王山 이라는 표기를 선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도 비록 한 번에 불과하지만 인왕산을 표기할 때에 성할 왕을 사용한 적이 있으니 딱히 일제의 조작에 의해서 성할 왕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한 것인 듯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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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천 약수터 옆에 새겨져 있는 바위 글자 / _IMG_2585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하지만 해방 이후 극일감정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인왕천 옆에 새겨진 바위 글씨를 보면 가운데의 성할 왕 자의 날일 변이 지워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좌우 살필 것 없이 일제의 흔적이라면 없애버리고 싶었던 감정도 부당하다 할 것은 아니지만, 전후를 살피고 정확한 근거에 따라 판단하고 보전 여부를 결정하는 냉철함에 있어서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다.


인왕천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는 길은 가파른 경사 탓에 딛고 내려갈 바위에서 눈을 떼기 힘들다. 하나씩 바위를 밟고 내려가던 도중 재미있는 돌 하나를 발견했는데, 계단석 중 하나로 쓰이고 있는 돌에 글씨가 새겨진 흔적이 눈에 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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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천 골짜기의 계단석 중 하나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 / _IMG_2581_ep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사진으로 바위를 촬영할 때에는 왕대곤('王大坤')으로 읽었는데, 이미지를 살펴보면 첫 글자가 모호하다. 글씨가 새겨진 바위를 깨서 계단으로 놓은 것인지, 글씨를 새기다 잘못된 것을 계단으로 쌓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호기심에 사람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앞 글자를 성씨 김('金')이라 가정하여 인물을 찾아봤더니 순조(19세기 초) 때에 홍문관(弘文館)을 한 인물이 한 명 검색된다.


김대곤(金大坤), 본관은 서흥으로 순조 16년 병자식 을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무안현감(行務安縣監)을 지냈다고 한다.


엉뚱한 돌을 보고 엉뚱한 사람을 찾아낸 것인지는 몰라도 호기심을 가지고 동네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런 뜻하지 않은 것들과 만나게 되는 기회가 종종 생기곤 하는 것이 서촌에 사는 큰 즐거움 중 하나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버스정류장 근처를 오가다 보면 리틀 브라운은 눈에 잘 띠어도 그 옆에 있는 가게는 눈에 잘 안들어온다. '끼니와 새참'이라는 가게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언제부터 석장 짜리 대자보가 붙어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처음 발견한 것은 지난 달 23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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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2541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간판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근래에 서촌이 겪고 있는 변화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자리잡고 있던 가게이다. 이와 비슷한 가게들은 지금 동네에서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자하문로 양편으로는 바로 옆의 전산소모품 가게 처럼 인쇄용품이나 허름한 옷가게들도 꽤나 있는 편이지만 최근 들어 속속 문을 닫고 있다. 자하문로는 왕복 6차선 도로다. 대로변인 만큼 변화가 가장 먼저 드러나는 곳일 수 밖에 없다. 문제가 있다면 이러한 맥락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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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2276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전 모롤화점 주인님! 앞으론 법대로 외치시더니 뒤로는 몇십년을 세금포탈하셨더군요. 임대수입이 있으면 반드시 세금신고 하셨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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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2280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저는 권리금 한 푼 없이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참담하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적습니다. 10여년전 2003년 8월 보증금 1300만원 권리시설비 합 4,000만원에 생계를 목적으로 장사를 하면서 임대료 한 번 밀려 본 적 없었습니다. 재계약시 마다 임대료를 올려주어 현재는 월 90만원씩 임대료를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2011년 5월 말 경 전 모롤화점 주인은 갑자기 2011.6.9 까지 가게를 비우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하였고, 계약기간이 남았으니 계속장사를 하겠다 하였습니다.

그 후로 모롤화점 주인은 제 가게만 임대료를 받으러 오지않고 양쪽 옆가게들만 몰래와서 받아가곤 했습니다. 지난 10여년동안 오로지 현금으로(월 90만원)만 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계좌번호는 구경도 못하고 계약서상의 근거로 임대료를 받아 가실것과 계좌번호 보내달라는 내용증명을 보냈고 휴대폰 문자로도 몇 번 보냈지만 아무런 답이 없어 우체국을 통하여 우편환으로 2회에 걸쳐 임대료를 보내니 모롤화점 주인은 임대료를 보내지 말 것과 명도소송하겠다는 내용증명을 보내온 것입니다. 모롤화점 주인은 고의로 피하면서까지 임대료 3개월 이상 밀리면 명도할 수 있는 법적 근거의 만행을 법이라는 잣대에 맞추어 계획적으로 쫓아내려고 온갖 횡포와 수단과 방법을 지금도 자행하고 있고 어쩔 수 없이 3개월 임대료 밀린 원인으로 권리금도 한 푼 없이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에는 양자의 이해와 입장이 서로 엇갈리는 것이겠지만, 일단 대자보의 내용만 봤을 때에는 충분히 억울할 일이고,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참 고약한 경우다. 앞에서는 '전 모롤화점 주인'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모롤화점 주인이 바뀌었고 현재의 주인이 아닌 예전 주인이 당사자가 되는 듯 하다. 그렇다면 지금 모롤화점에 붙어있는 'SINCE 1948'는 주인이 바뀌어도 계속되는 근거가 뭘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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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2545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왕복 6차선 도로 변에 있는 가게가 재계약 때마다 세를 올려주어서 현재 월 90만원이라면 결코 비싼 세는 아니다. 자하문로 이면에 있는 왕복 2차선 도로변에도 월세로 100만원을 부르는 것이 요즘의 동네 호가인 것을 감안하면 월 90만원은 상당히 싼 편이다. 그렇다고 월세 100을 부르는 자리라고 모두 점포가 입주해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2년 새에 호가는 2배 이상 높아졌지만 실제 그만큼 장사가 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국 기존 상인들은 임대료 상승으로 쫓겨나가고 가게는 비워진 채 건물주도 임대수익을 올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근래의 동네 현황으로 보인다.


새로 가게를 들이는 데 성공한 경우, 건물주는 이득을 본다. 반대로 새로 들어온 세입자는 가게를 뺄 때 받아 낼 권리금 외에는 이익을 보기 힘들어진다. 결국 집주인만 돈을 번다.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 상인들은 내 가게가 아닌 이상에야 열심히 일해서 임대료 올려주고 나면 권리금 밖에 손에 쥘 것이 없다.


그래서인지, 요즘 동네에 새로 열리는 가게들 중에는 장사에는 관심 없고 권리금만 노리고 들어온 신선같은 가게들이 많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인심 좋은 재밌는 가게라고 트위터에, 블로그에 자발적으로 광고도 해준다. 작년 가을부터 눈에 도드라지기 시작한 흐름이다. 실제 삼청동과 같은 동네에서 장사는 못해도 권리금만 잘 챙기면 돈 벌어 나오는 경험을 통해 돈버는 법을 배워온 이들이 적지 않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세가 뛰고 권리금이 붙다보면 결국 장사하는 사람은 더 이상 자리 잡을 수 없는 동네가 된다. 높은 세와 권리금이 정착된 자리에는 오로지 대기업 프랜차이즈만 들어올 수 있다. 그 수익률을 떠받치려면 동네 거주자들로는 부족하다. 삼청동, 인사동 처럼 관광객들, 방문객들이 북적여야 한다. 다시 말해 사람사는 동네가 아니어야 한다. 삼청동이 고향이던 사람들은 이미 모두 고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요즘 서촌 사람들은 다들 옆동네 삼청동의 모습을 떠올리며 두려워 한다.


임대료는 올라가고, 못 보던 가게는 늘어난다. 권리금이 생겨나고 사람들이 늘어나면 이제 사람 사는 동네는 더 이상 어렵다. 그런 흐름이 '끼니와 새참'에 붙은 대자보에서 읽힌다. 고민은 갈수록 깊어간다.


구룡산을 병풍 삼고 양재천을 앞에 둔 밀미리에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조선조 중기인 인조때부터이다. 예전에 장마가 들면 한강물이 범람하여 양재천을 거슬러 마을까지 밀려들었고, 때로는 뚝섬 나룻터의 돛배도 들어왔다. 이런 이유로 밀물 마을, 밀미리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를 한자로 물이 밀려온다는 水潮村으로 불리웠다. 또한 지리적으로 개포리를 지나 두 번째로 물이 밀려왔고, 이 큰 물은 해마다 두 번 정도 들었기에 浦二里라고 하였다.
행정구역상 이곳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포이리로 불리다가, 1963년에 서울시로 편입되었다. 1982년부터 서울시에서 실시한 개포지구 구획정리 사업에 따라 1986년에 이르러 농촌부락으로서의 명맥은 끊기고 주택 및 상가가 혼합된 상업지역의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화목한 공동체를 엮어가던 밀미리 원주민들은 현재도 이곳에 거주하면서 고향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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遊山西村 유산서촌


陸游 육유

지난 겨울 농가에서 담근 탁한 술을 쉽게 보지 마오

풍년들어 닭과 돼지는 손님 맞기에 충분하니


산도 물도 다하여 길이 없나 했건만

버드나무 깊숙히 꽃 만발한 마을이 다시 하나


피리소리 북소리가 노니니 춘사(春社)에 가깝고

수수한 차림새는 옛 향취를 품었네


이제부터라도 한가로이 달맞이 갈 수 있다면

지팡이 쥐고 밤 어느때고 문을 두드리리라


莫笑農家臘酒渾 막소농가납주혼

豊年留客足鷄豚 풍년유객족계돈

山窮水盡疑無路 산궁수진의무로

柳暗花明又一村 유암화명우일촌

蕭鼓追隨春社近 소고추수춘사근

衣冠簡朴古風存 의관간박고풍존

從今若許閑乘月 종금약허한승월

拄杖無時夜叩門 주장무시야고문








“정치1번지라는 종로가 말이 시내지 시골읍내같지 않느냐면서 한탄하셨습니다.”


2012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동네를 돌아다니던 한 예비후보가 SNS로 전한 메시지는 흥미롭게도 조선후기 중인문학의 주요인물로서 조선후기를 살다 간 장혼(張混, 1759~1828)이 서촌(옥류동, 현재의 옥인동)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연상케 한다.


“물줄기가 모인 곳을 젖히고 들어가면 좌우의 숲이 빽빽하게 모여 있고, 그 위에 개와 닭이 숨어 살며, 그 사이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았다. 옥류동은 넓지만 수레가 지나다닐 정도는 아니고, 깊숙하지만 낮거나 습하지 않았다. 고요하면서 상쾌하였다. 그런데 그 땅이 성곽 사이에 끼여 있고 시장바닥에 섞여 있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아끼지는 않았다.”[서촌. 1, 역사 경관 도시조직의 변화(서울역사박물관 편, 2010) 중]


‘사대문의 중심인 종로에 이웃하면서도 시골 같은 동네’라는 말은 200년 전은 물론, 2012년 오늘날에도 여전히 서촌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셈이다.

서촌의 골목길도 200년 이상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최초의 근대 지도라는 한성부지도(漢城府地圖, 1902)는 물론, 18세기의 한성을 가장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도성대지도(都城E大地圖)에서도 오늘날 서촌의 골목길 형태를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길썰미만 있으면 조선시대 지도를 펼쳐놓고도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표시할 수 있고, 찾아갈 수 있는 동네라는 이야기다.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 ⓒ 문화재청


길이 변하지 않는데 집자리만 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집자리와 길자리를 모두 밀어버리는 재개발이 아닌 한에야 길이 그대로라면 그 길을 통해 닿았던 집자리의 모양도 크게 달라질 수 없음을 쉽게 짐작해 알 수 있다. 1910년에 시작된 일제의 조선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처음 만들어진 지적도를 보아도 지금의 지적도와의 차이점을 찾아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주로 관청이 소재하던 서촌에 본격적으로 주거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계급에 따라 주거지가 구분되면서 중인을 비롯한 이서계층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부터로 알려져 있다. 양반도 천민도 아니었지만 전문지식과 기능을 갖추고 있던 중인계급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계급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골목문학’이라는 뜻의 위항문학(혹은 여향문학)의 대표격인 시인 공동체 ‘옥계시사’도 서촌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단원 김홍도는 이들의 모임을 그림으로 그렸고, 추사 김정희는 이들 모임을 위해 ‘松石園’(송석원)이라는 글자를 써서 바위에 새겼다.

옛 모습을 이어가던 서촌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1930년대이다. 경제공황이 휩쓸고 간 후, 경기가 다소 회복되면서 경성으로 지방민들이 급격히 유입됨과 동시에 부동산 경기가 활황을 맞는다. 폭발하는 주택 수요에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던 집이 팔리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20평 내외의 땅에 10평 내외로 지어진 근대 도시형 한옥이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북촌, 서촌을 막론한 경성 전역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은 250년을 내다본다는 ‘대경성 도시계획’이라는 이름으로 경성이라는 도시 전체를 술렁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당시 개발 과정에서 큰 필지를 나누어 대량으로 공급됐던 한옥들은 지금도 곧게 뻗은 골목 양쪽으로 늘어선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1930년대의 대량주택공급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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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이완용과 윤덕영이 소유했던 거대한 땅과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집들이 비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전쟁으로 피난민이 유입되면서 서촌은 좀 더 비좁아진다. 경제개발시대에 상경한 지방민에 청계천 복개 공사로 집을 잃은 사람들까지 일부 서촌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판자집은 늘어나고 한옥집은 칸칸마다 한 가구씩 사는 집도 적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주거 환경이 열악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남파된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눈앞에 두고 진압되었던 청와대 습격사건은 서촌에 긴 인내와 고통의 시간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청와대에 인접한 동네라는 이유로 집을 고치려면 허락을 받아야 하고 지붕에라도 올라가면 경호원이 쫓아왔다는 주민들의 생활은 계엄령이나 긴급조치 처럼 얼마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개발의 엔진 소리가 드높을 때에도 서촌은 그로부터 비껴져 남겨지게 된 것은 분단의 현장이 천혜의 자연으로 돌아온 비무장지대를 연상시키게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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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0138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촌은 가장 큰 변화를 겪게 된다. 1992년, 인왕산에 맞닿은 누상동이 노후불량주택 밀집지역이라는 이름을 달고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지정되고, 1994년에는 지금 서촌을 관통하고 있는 필운대로에 대한 계획이 추진되기 시작한다. 신교동에도 좁은 길 사이로 빌라가 들어선다. 당시에 빌라를 짓기 위해 주택을 허무는 과정에서 기와집이 헐리는 것은 물론 초가집들도 대거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달동네라는 이유로 인왕산과 맞닿은 동네를 중심으로 사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오히려 큰 도로에 가까운 체부동, 누하동, 통인동에는 기와집들이 많이 남게 된 것은 이러한 전후를 알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근래 들어 서울시의 한옥보존 정책과 맞물려 누하동, 체부동을 중심으로 한옥수선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주거환경개선’이 반드시 기존의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운 복층 건물을 지어야만 하는 것이었는지 생각해 볼 문제가 될 것이다.

커다란 변화를 여기에서 마무리하는 것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서촌의 골목에는 재개발을 외치는 고함소리가 드높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 때에 약속한 체부동, 필운동, 누하동, 옥인동 재개발과 오세훈 서울시장의 한옥보존정책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한옥보존을 조건으로 더이상 재개발이 진행될 수 없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아직도 열악한 주거환경과 한옥보존의 갈등은 잦아든 불씨로 남아있다. 옥인동 재개발의 경우, 아직 불씨가 꺼지지 않은 채 뜨거운 입김을 내뿜고 있다.

시내를 걸으며 고층 건물 발치에 조용히 놓여있는 표석을 읽는 것만으로 역사 속의 사건이나 장소를 상상할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다. 어느 누가 살던 집, 어느 누가 걷던 골목은 그러한 앙상한 기록에 생생한 숨을 불어넣을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이것은 비단 흔히 생각하는 거창한 ‘역사’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이 동네를 살았던 어느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풍경은 단순히 오래된 것으로써의 가치가 아니라 그 시간의 심연에서부터 지금까지 유구하게 켜를 쌓아온 퇴적의 산물이고 시간의 증거로써의 가치를 지닌다. 서촌은 그래서 재현될 수도 모사될 수도 없는 그 자체로 기원, 즉 오리지널이 되는 동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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