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문(彰義門) / CC 김한울


창의문은 서울성곽의 모든 문 중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문입니다. 도읍을 정한 후에 세워져 영조 때인 1741년과 해방 후 1956년에 보수했습니다. 본래 이름인 창의문 외에도 장의동문(藏義洞門), 장의문(壯義門), 자하문(紫霞門)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대부분 군사나 왕실의 출입 외에는 닫혀있어 통행이 많지 않았으나 광해군이 폐위되던 인조반정 때에 반정군이 진입한 문이라서 정치적으로 의미가 컸다고 합니다. 창의문 문루 안에 들어가면 여러 이름이 작호(爵號)와 함께 쓰여진 현판이 있는데, 바로 이 때에 공을 세운 공신들입니다. 다만, 인조반정 직후 이괄의 난으로 공신에서 제외된 이들은 적혀있지 않습니다.


영조 때에는 인조반정의 반정군을 의군(義軍)이라 했다고 합니다. 공신의 이름을 적은 현판은 현판 중에 가장 격이 높은 사변형(四邊形, 테두리와 봉이 달려있는 형식)으로 제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조선시대에 창의문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곽의 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참에 한가지 덧붙이자면, 항간에는 일제시대 때 문의 격을 낮추기 위해서 흥인지문(興仁之門)을 동대문(東大門)으로, 숭례문(崇禮門)을 남대문(南大門)으로 부르게 했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전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펼쳐보면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축성역글, 방정부(築城役訖, 放丁夫, 성 쌓는 일이 끝나자 인부들을 돌려 보내다) - 태조 5년(1396년) 

正東曰興仁門, 俗稱東大門。 ... 正南曰崇禮門, 俗稱南大門。

정동(正東)은 흥인문(興仁門),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다. ..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 속칭 남대문(南大門)이다.


일제 시기가 엄혹하였다고는 하지만 사실과 다른 낭설로 오히려 옛부터 전하던 고유의 것을 잘못됐다고 하거나 없애려 하는 경우가 종종 눈에 띱니다. 좀 더 정확히 살펴서 구분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그동안 이런 낭설로 꺼림칙했던 분들은 이제 동대문을 동대문이라, 남대문을 남대문이라 맘편히 불러도 좋겠습니다.



창의문 문루의 '개해거의정 사공신(인조반정 공신)' 현판 / CC 김한울


현판에 적힌 글의 전문을 옮겨적어 봤습니다.



癸亥擧義靖 社功臣

개해거의정 사공신


一等

일등


昇平府院君 金瑬

승평부원군 김류


延平府院君 李貴

연평부원군 이귀


平城府院君 申景禛

평성부원군 신경진


完豊府院君 李曙

원풍부원군 이서


完城府院君 崔鳴吉

완성부원군 최명길


綾城府院君 具宏

능성부원군 구굉


靑雲君 沈命世

청운군 심명세


二等

이등


順興君 金慶徵

순흥군 김경징


東城君 申景禋

동성군 신경인


靑興君 李重老

청흥군 이중노


延陽府院君 李時白

연양부원군 이시백


新豊府院君 張維

신풍부원군 장유


原平府院君 元斗杓

원평부원군 원두표


咸陵府院君 李澥

함릉부원군 이해


東平君 申景裕

동평군 신경유


順原君 朴孝立

순원군 박효립


玉山君 張暾

옥산군 장돈


綾川府院君 具仁垕

능천부원군 구인후


德昌君 張紳

덕창군 장신


三等

삼등


啇原君 朴惟明

상원군 박유명


西原君 韓嶠

서원군 한교


鎭南君 宋英望

진남군 송영망


咸寧君 李沅

함녕군 이항


完川君 崔來吉

완주군 최래길


靈原君 申景槙(植)

영원군 신경식


綾豊府院君 具仁塈(墍)

능풍부원군 구인기


豐(豊)安君 趙潝

풍원군 조흡


完南府院君 李厚源

완남부원군 이후원


南陽君 洪振道

남양군 홍진도


原溪君 元裕男

원계군 원유남


月城君 金元亮

월성군 김원량


平興君 申埈

평흥군 신준


武平君 盧守元

무평군 노수원


杞平君 俞(兪)伯曾

기평군 유백증


錦洲君 朴炡

금주군 박정


益寧府院君 洪瑞鳳

익녕부원군 홍서봉


韓川君 李義培

한천군 이의배


完溪君 李起築

완계군 이기축


完興君 李元榮

완흥군 이원영


壺山君 宋時範

호산군 송시범


晉平君 姜得

진평군 강득


益豊君 洪孝孫

익풍군 홍효손


靑川君 柳舜翼

청천군 유순익


西城君 韓汝復

서성군 한여복


南昌君 洪振文

남창군 홍진문


晉川君 柳䪷

진천군 유구


 


* 참조_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역대인물정보시스템] 정사공신(靖社功臣)

* 현판에 적힌 글씨의 자체(字體)를 최대한 따라 표기하느라 참조의 자료와 다른 글자는 참조의 자료에 있는 한자를 괄호 안에 적어넣었습니다.

누하동 181번지에는 청전화숙과 함께 청전 이상범 화백의 집이 보존되어 있다. 청전 이상범 화백은 1928년, 조선일보에서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겨 삽화를 그렸는데, 1936년 손기정 옹의 마라톤 금메달 보도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경찰에 잡혀갔다가 풀려난 후 동아일보를 그만두게 된다.


청전 화백이 동아일보에 재직하던 때인 1935년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소설인 <흑두건(黑頭巾)>에도 청전의 삽화가 들어있는데, 그 중에 1935년 2월 9일자 220회 연재에서는 서울 지리, 그 중에서도 서촌에 대한 재미있는 내용이 있어 소개한다.


黑頭巾 <220> - 동아일보(1935.2.9.)

윤백남(尹白南) 작

이청전(李靑田) 화


강항은 동대문박 복차다리께서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야 야주현에 이르기까지에 수없이 술을 사서 먹엇다.

억병같이 취한강은 무슨 생각이 낫던지 야주현에서 위대로 가는 길로 드러섯다.

거기서부터 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어디를 어떠케 헤매고 돌아다니엇던지 그는 금충교 대리에 와서 씨러지고 말엇다.

인적이 끄닌 금충교 돌다리 위에서 그는 업드러진 그 자세대로 인사불성에 빠지고 말엇다.

...(중략)...

그러나 치위보다 더 그를 괴롭게한것은 갈ㅅ증이엇다.

목은 말러부터서 기침을 할 대 마닥 앞엇다. 그리고 입에는 침 한 점이 없어서 혀가 맘대로 돌지 안는다.

이 개천물이 만일에 훨씬 상류이엇더면 그는 의당 개천물이라도 손으로 훔켜서 목을 축엿을것이지마는 금충교 개천은 수채나 다름없는 더러운 물이라 아무리 갈ㅅ증이 심하다 하드라도 차마하니 그 물을 마실 수는 없었다.


인용된 부분에 나오는 지명을 살펴보자면, '복차다리'는 현재의 창신동으로 대략 동대문역과 동묘앞 역 사이 쯤이 되고, 야주현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뒷쪽 당주동 일대를 일컫는다고 한다.


강항이라는 주인공은 동대문에서부터 술을 이어마시며 걷다가 결국 야주현에서 위대로 들어가는 길에 들어선다. 위대는 '웃대'라고도 하는데, 소설에 표기된 것으로 보아 30년대 당시에는 '웃대' 보다는 '위대'라는 발음이 더 일반적이었던 듯 하다. 혹은 30년대 당시 조선시대의 지명을 고증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당주동에서 위대로 접어드는 길이라면 세종문화회관 뒤에서 종교교회 앞을 지나 경복궁역으로 향하는 북서방향의 길이 되는 셈인데, 결국 주인공은 지금의 경복궁역인 금천교 돌다리에 이르러 정신을 잃고 만다.


지금은 '금천교시장'이라는 이름이 가장 흔히 불리는 이름이고, 얼마 전부터는 고약하게도 종로구청에서 '세종마을음식문화의 거리'라는 생뚱맞은 이름을 붙여버리기도 했지만, 예전 신문기사를 찾다보면 '금충교'라고 부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금천교는 1928년에 일제가 길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헐려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흑두건이라는 소설의 배경이 금천교가 헐리기 한참 전인 조선 광해군 때인 탓인 듯 하다.


이 금천교 아래로 흐르는 물은 주인공 강항이 걸어왔던 길을 따라 세종문화회관 뒤를 지나 광화문네거리를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는데, 소설에도 나타나듯 지금의 수성동계곡이 있는 옥류동천 상류나 북악산에서 발원하는 백운동천 상류는 제법 맑은 물이 있어서 빨래터 등이 설치되어 있기도 했다.

참고로 흑두건은 30년대 이후 여러차례 단행본으로 출판된 바 있으며, 작자인 윤백남(1888~1954)은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으로 조선 최초의 희곡을 쓴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의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라고 하면 누구나 알겠지만, 최승희에 무용을 권하고 후에는 최승희의 자서전을 대필하여 출판한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최승일은 서울 출생으로 배재 출신으로 동경일본대학으로 유학을 다녀와 1922년에는 소설 〈상록수〉의 심훈과 함께 염군사(焰群社)에 가담하기도 했던 조선 예술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경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가 서촌과도 인연이 있는 것은 어찌보면 싱거운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또한 각별히 언급될 만 한 장소가 있는 탓에 무심히 지나칠 일도 아닌 듯 하여 자료를 찾아보았다.


동경일본대학 미학과에서 돌아 온 최승일(崔承一)은 대표적으로 북풍회(北風會), 경성청년회(京城靑年會),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프로예맹) 등에서 활동했으며, 그가 활동한 중에 '극문회(劇文會)'와 '라디오극연구회'는 지금의 서촌에 해당하는 사직동과 체부동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중 극문회는 경성으로 돌아온 최승일의 이름이 처음 나오는 계기가 되는데, 처음부터 연극 연구와 강연, 잡지발행 등을 통해 조선의 연극을 개량코자 조직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진취적인 활동을 펼쳐나갔을지, 짐작하게 되는 바가 있다.



劇文會創立 - 동아일보(1922.4.5)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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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동 187번지에서 극문회를 시작하고 2년 반 여가 지난 후인 1924년 12월 11일에는 프로(professional 아닌 prolétariat 의미) 작가와 미술가들 50여명 등이 함께 『경성청년(京城靑年)』을 창립하여 청년총동맹(靑年總同盟)에 가입하기로 결의한다. 여기에서 선출된 13인의 집행위원 명단에서도 최승일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京城靑年』發會 - 동아일보(1924.12.13) 2면

[ 지면보기 ]



잠시 경성청년회를 살펴보자면, 경성청년회는 사무실을 재동 84번지에 두었는데, 이 곳은 현재 현대 계동 사옥 서쪽 일대로 현재 84번지는 40여개의 필지로 쪼개어져 있다.


창립 총회 때에 집행위원에 위임한 강령과 사업안을 다음 해 3월 신문지상을 통해 발표한 바 있는데, 그 내용이 당시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있어, 현대어로 바꾸어 옮겨본다.




식민 경성에서 워낙 활발한 활동을 하던 최승일인 만큼, 여기서는 1926년 결성한 '라디오극연구회'만 다룬다. 최승일은 라디오극연구회를 통해 시험 방송을 주도하다가, 경성방송 개국 후에는 방송극을 연출하며 조선 최초의 방송 프로듀서가 되었다. 당연히도 이 때에 최승일이 연출한 방송극은 조선 최초의 방송극이다. 또한 그의 아내 마현경은 경성방송 첫 공채 아나운서로 그 전까지 진행을 맡던 이옥경 아나운서와 함께 조선 최초의 아나운서이기도 하다.


경성방송국 개국 전의 최승일이 이끌던 라디오극연구회의 주소는 체부동 137번지이다. 



라듸오劇硏究會創立 - 동아일보(1926.6.27)


기사는 '이달 그믐께'(1926년 7월 초순)에 체부동 137번지에서 최승희 원작 이경손 각색의 단막극 <파멸(破滅)>을 공개 시험할 예정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1925년 6월 무렵부터 시험방송을 했다고는 하지만, 아나운서가 없어 기술국 직원이 번갈아 아나운서 역할을 해오다가 1927년 2월 16일에야 경성방송국의 첫 전파가 송출되었다고 하니, 어쩌면 이 때 공개 시험으로 진행 된 <파멸>은 조선 최초의 라디오극으로 쓰여진 작품이지 않았을까. 경성방송국은 조선중앙방송국과 한국방송(KBS)의 전신이다.

서촌에 한 번 쯤 와봤다면 들르는 체부동의 토속촌삼계탕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다녀간 집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후로 손님의 매해 늘어 이제는 일곱 채의 한옥을 식당으로 쓰고 주변의 빌라를 조리실 및 숙소 용도로 매입하는데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주차장도 부족하여 골목 건너편의 집들을 매입해서 지난 1년 사이에 가옥을 모두 철거하고 주차장으로 만들었는데 체부동 137번지 가옥이 이 때에 헐려나가고 말았다. [ 다음로드뷰로 보기 ]


최승일의 극문회가 자리잡은 사직동 187번지도 언제 사라졌는지 현재는 광화문풍림스페이스본 106동 서쪽 골목 어귀에 187-1이라는 지번만 남아있다. [ 다음로드뷰로 보기 ]


마지막에서 밝히자면 이 포스팅은 70년대 초중반에 걸쳐 체부동 138번지에 거주하셨던 분의 말씀을 따라 혹시나 관련한 역사가 있는지 찾아보던 중, 체부동 137번지에 대한 kurtnam 님의 포스팅 [ 기록에 관한 기록 ]을 찾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삼계탕집 주차장 부지에서 드러나는 철거된 역사에 대한 아쉬움은 역사의 기록과 그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그 망각에 대한 형벌이란 이처럼 무섭도록 정직하게 내려지고 만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현재 경복궁역 사거리에서 '자하문터널'로 이어져 세검정로에 닿는 길을 '자하문로'라고 하고, 궁정동에서 북악산 허리를 타고 올라 창의문(자하문)과 '윤동주 시인의 언덕' 사이로 백악과 인왕을 잇는 능선을 넘어 부암동 주민센터로 닿는 길을 '창의문로'라고 합니다.


하지만 자하문로는 '자하문길'로 불린 시간도 만만치 않습니다. 1986년에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길 이름을 '자하문길'로 명명하기도 했지만, 언론 보도에서는 1984년부터 '자하문길'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기도 하니까요.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이 길의 이름을 '자하문길'로 명명한 것은 공사 완공을 한달여 앞둔 86년 7월 말이었습니다. 



청운동~세검정路 「자하문길」로 名命 - 경향신문(1986.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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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마무리 공사중인 청운동~세검정간 도로(너비 25~29m, 길이 1,590m) 이름을 「자하문길」로 의결하였다는 기사입니다. 1984년 신문보도로 공사계획이 보도될 때에는 '청운쌍굴'로도 표기됐던 자하문터널도 이 때에 함께 지금의 이름을 얻습니다. 



清雲(청운)·平倉(평창)동일대 아파트·빌라團地(단지)로 단장 - 경향신문(1984.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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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는 기존 도로의 확장과 직선화, 터널 개통, 주택조성으로 진행됐습니다. 지면에 게재된 계발계획도 중 자하문로와 관련된 부분만 살펴보면 현재의 자하문터널 남쪽 입구에서부터 610m 길이의 도로를 신설, 확장하는 사업으로 진행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간의 길이를 현재의 지도에 적용해보면, 지금의 터널 남측 입구에서부터 경기상고 정문 앞까지가 신설구간, 경기상고 정문 앞부터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까지가 확장구간에 해당함을 알 수 있습니다.




지도에 표시된 구간 아래로 지금의 경복궁역 사거리로 이어지는 길은 '추사로', '궁정로' 등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 길은 정부 발표를 인용한 언론 보도에서는 통상 '적선동107~궁정동13'(혹은 '적선동107~청운동108') 구간으로 표기되었습니다.



內資洞~청운國校 도로 1.6km 확장 준공
- 동아일보(1978.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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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한 가운데 넓게 펼쳐진 자하문로의 모습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착공이 같은 해 6월이니 폭 40m의 도로로 확장하기 위해 사유지 306필지(6,335평)를 수용하고 건물 141동(5,918평)을 철거하는데에 불과 반년 밖에 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문은 1990년 8월 철거된 내자호텔부터 청운국교 사이의 1.6km도로라고 적고 있는데, 이 때문에 자료를 검색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같은 길을 두고 기사 마다 '적선동107~궁정동13'이나 '내자동~청운국교' 등으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으니, 자하문로에 관한 내용을 찾으려면 우선 길을 일컬을 때 쓸 수 있는 모든 단어를 꼽아봐야 하는데다, 단어의 조합이 많아지는 만큼 정확한 정보를 찾아내기까지의 검색 시간도 길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한 번 정해놓고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 역사를 복기하고 시간을 되살리는 데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시 한 번 환기하게 됩니다. 


자하문길은 아마도 김대중 정권 당시 길이름을 종횡에 따라 구분하면서 지금의 이름인 '자하문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누하동 오거리에서 체부동 골목으로 접어들면 라파엘의 집 뒤편을 지나 길이 굽으며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_IMG_0422
체부동 107번지 건물 전면 / _IMG_0422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잠시 멈춰 가만히 살펴보면 처음부터 사람이 살기 위해 지어진 집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다른 사연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열린 문 안쪽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면 햇볕도 잘 들지 않는 좁다란 복도를 따라 다닥다닥 방문이 줄지어 있는 풍경이 나타납니다.


쓰레기 배출에 대한 주의문구가 붙어있는 것을 보면 여러 사람이 살고 있는 다가구 주택임을 알 수 있지만, 문 간격으로 봐서는 쪽방촌을 연상케 합니다.


이런 건물은 흔하지는 않지만 잘 살펴보고 다니면 또 의외로 눈에 띠는 종류의 건물인데, 짐작에는 공장이거나 공원(工員)들을 위한 숙소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몇 걸음 물러서서 보면 앞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게 제법 길쭉하게 자리잡고 있는 건물임을 알 수 있는데요. 짐작에 힘이 실리는 대목이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처음부터 사람이 거주 할 목적으로 지은 건물이 이렇게 길쭉한 형태에 실내는 어두침침하게 지어지지는 않으니까요. 게다가 밖으로 나있는 창도 그리 친철해보이지는 않습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동네의 곳곳을 안내하고 설명하기도 했지만, 이 건물에 대한 궁금증은 좀처럼 해결 할 기회를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발견한 옛 신문 기사가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네요.



都心(鍾路·中區)공장 모두 移轉 - 경향신문(1978.3.23.)
PDF 지면 보기 ]



서울시는 1978년 3월 23일, 종로구와 중구 등 도심지역의 공장을 1980년까지 모두 변두리나 지방으로 이전하는 방침을 확정하여 발표했습니다. 이 때에 이전 명령을 받은 업소 중에는 '태화두부 공장'과 '태성두부'라는 곳이 있는데 체부동 107번지와 통의동 118번지에 각각 소재했다고 합니다.


서울시에서는 도심 인구 과밀 해소를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기사에서 지적하고 있다시피 영세한 공장들을 지방으로 옮기면 직원들의 통근만 불편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직원 통근 문제 뿐만 아니라, 생산과 소비가 인접할수록 편리한 생필품의 경우에는 '직주근접(職住近接)의 원칙'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에 비추어도 당시 서울시가 밝힌 공장 이전의 이유가 쉽게 납득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이 건물을 보면 공장이 이전되고 나서 직원들은 멀리 떠났을 지는 몰라도 작은 방들이 줄지어 들어서 오히려 도심 인구는 늘어나는 셈이 된 듯 합니다.


'태화두부 공장'과 달리 '태성두부'가 자리하던 통의동 118번지는 포털 지도서비스에서 지번이 나타나지 않는데, 인근 번지를 보아서는 옛 '커피즐겨찾기' 근처로 1978년 6월 자하문로 확장 공사가 착공되면서 철거되고 지금은 길 위에 어디 쯤으로 남게 된 듯 합니다.


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도 골목 어귀에는 두부공장이 있었는데, 뚝딱거리던 소리와 펄펄나던 김이 무척이나 활력있어 보였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때 그 두부공장도 체부동 107번지 건물과 닮았던 듯 하네요.


혹시 지금도 주거지 가운데에 남아서 두부를 만들고 있는 두부공장이 있을까요? 동네 슈퍼를 가더라도 브랜드 로고가 선명한 두부들 사이에 고군분투하는 전국구 두부 브랜드들 밖에 볼 수 없는 지금에, 동네 두부공장과 저녁시간이면 딸랑대던 두부 아저씨 생각이 다시 납니다.



지도를 클릭하시면 위치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서울 사람이라도 인왕산과 북악산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인왕산 호랑이라는 말도 흔하고 청와대 뒷배경으로 우뚝 선 북악산도 화면을 통해 자주 접할 수 있지만 세종로에 서면 북악만 보일 뿐 인왕을 보기는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인왕이 숨겨진 산이 되어버린 데에는 광화문 바로 앞에 말의 눈가리개처럼 세워놓은 정부종합청사 건물도 톡톡히 한 몫 하고 있다.


지난 달 수성동 계곡이 복원사업을 마치고 일반에 개방되었으니 이 계곡을 오가며 인왕의 능선을 눈에 익힐 기회는 늘어난 셈이니 인왕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낯익게 다가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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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동 계곡 기린교 앞에서 바라본 인왕산 / _IMG_0478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수성동 계곡에서 올려다 본 모습에서는 인왕산 중에서도 정상을 이루고 있는 치마바위가 시야를 채우는데, 치마바위 바로 북쪽 골짜기는 너무나 가파라 치마바위 발치에 있는 석굴암에서 길이 끊긴다. 석굴암 오르는 길 바로 다음 계곡으로 만수천을 지나 북쪽 능선을 타고 정상에 이르는 길이 있는데, 서촌에서 인왕을 오르기에는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등산로가 된다.


다른 동네에서 등산 오는 분들은 등산복에 장비까지 채비를 잘 갖추고 오기도 하지만, 말하자면 서촌의 동네 뒷산이라고 할 수 있는 인왕산은 마음 내키면 샌들 신고 올라가도 충분한 산이다. 하지만 그 가파른 산길은 짧지만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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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정상에서 남쪽 능선을 따라 이어진 성곽길 / _IMG_2577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 사진 가운데 부분을 가로지르며 내려가는 짙은 골짜기가 인왕천이 있는 등산로이다.


지난 주말에는 만수천을 거쳐 정상에 올랐다가 성곽을 따라 사직단으로 내려오는 길 중간에서 왼쪽으로 길을 틀어 인왕천을 따라 내려와봤다. 만수천으로 오르는 길도 가파르다 했지만 인왕천 길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인왕천과 만수천 모두 수성동 계곡으로 흘러들지만 인왕천은 말 그대로 인왕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물줄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풍경도 바로 곁에 있는 다른 골짜기와 사뭇 다른 것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 수 없는 구멍이 뚫린 바위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되기도 하고, 가파른 골짜기 따라 비좁게 나있는 돌계단길도 인왕산 자연암을 깎아 계단으로 만든 구간이 훨씬 길게 분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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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천 골짜기에서 보이는 독특한 모양의 바위 / _IMG_2584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인왕산이라는 이름은 조선에 들어 붙여진 이름인데, 인왕사라는 절이 있다고 해서 인왕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 전에는 '서봉(西峰)' 혹은 '서산(西山)'이라 불리웠다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도 태종이 사직단 자리를 정하는 부분에서 인왕산을 서봉이라고 언급한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인왕산의 한자 표기는 仁王山 으로 주로 쓰이는데, 일제 시대에 가운데 임금 왕('王') 자를 일본의 왕을 뜻하는 성할 왕('旺')으로 조작하였다 하여 성할 왕을 피해 仁王山 이라는 표기를 선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도 비록 한 번에 불과하지만 인왕산을 표기할 때에 성할 왕을 사용한 적이 있으니 딱히 일제의 조작에 의해서 성할 왕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한 것인 듯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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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천 약수터 옆에 새겨져 있는 바위 글자 / _IMG_2585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하지만 해방 이후 극일감정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인왕천 옆에 새겨진 바위 글씨를 보면 가운데의 성할 왕 자의 날일 변이 지워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좌우 살필 것 없이 일제의 흔적이라면 없애버리고 싶었던 감정도 부당하다 할 것은 아니지만, 전후를 살피고 정확한 근거에 따라 판단하고 보전 여부를 결정하는 냉철함에 있어서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다.


인왕천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는 길은 가파른 경사 탓에 딛고 내려갈 바위에서 눈을 떼기 힘들다. 하나씩 바위를 밟고 내려가던 도중 재미있는 돌 하나를 발견했는데, 계단석 중 하나로 쓰이고 있는 돌에 글씨가 새겨진 흔적이 눈에 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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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천 골짜기의 계단석 중 하나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 / _IMG_2581_ep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사진으로 바위를 촬영할 때에는 왕대곤('王大坤')으로 읽었는데, 이미지를 살펴보면 첫 글자가 모호하다. 글씨가 새겨진 바위를 깨서 계단으로 놓은 것인지, 글씨를 새기다 잘못된 것을 계단으로 쌓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호기심에 사람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앞 글자를 성씨 김('金')이라 가정하여 인물을 찾아봤더니 순조(19세기 초) 때에 홍문관(弘文館)을 한 인물이 한 명 검색된다.


김대곤(金大坤), 본관은 서흥으로 순조 16년 병자식 을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무안현감(行務安縣監)을 지냈다고 한다.


엉뚱한 돌을 보고 엉뚱한 사람을 찾아낸 것인지는 몰라도 호기심을 가지고 동네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런 뜻하지 않은 것들과 만나게 되는 기회가 종종 생기곤 하는 것이 서촌에 사는 큰 즐거움 중 하나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遊山西村 유산서촌


陸游 육유

지난 겨울 농가에서 담근 탁한 술을 쉽게 보지 마오

풍년들어 닭과 돼지는 손님 맞기에 충분하니


산도 물도 다하여 길이 없나 했건만

버드나무 깊숙히 꽃 만발한 마을이 다시 하나


피리소리 북소리가 노니니 춘사(春社)에 가깝고

수수한 차림새는 옛 향취를 품었네


이제부터라도 한가로이 달맞이 갈 수 있다면

지팡이 쥐고 밤 어느때고 문을 두드리리라


莫笑農家臘酒渾 막소농가납주혼

豊年留客足鷄豚 풍년유객족계돈

山窮水盡疑無路 산궁수진의무로

柳暗花明又一村 유암화명우일촌

蕭鼓追隨春社近 소고추수춘사근

衣冠簡朴古風存 의관간박고풍존

從今若許閑乘月 종금약허한승월

拄杖無時夜叩門 주장무시야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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