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2014년 11월 27일, 노동당 서울시당 [칼럼]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seoul.laborparty.kr/507


다들 어렵다.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경제적으로, 상황적으로.


고정된 수입이라곤 4년 동안 오백원도 없는 주제에 그래도 7년 직장생활 하며 모아둔 덕분에 아직 까먹을 돈이 남아있다고 CMS 로 매달 꼬박꼬박 빠져나가는 비용을 끊지 못하고 있는 게 몇 있다. 그 중에 정말 미안하다고 하면서 중단한 것들도 몇 있었는데, 지금은 도저히 더 줄이거나 없앨 수 없는 것들만 남았다. 무엇 하나를 먼저 없앨 수도 없다. CMS를 더 줄이느니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고 돈을 버는 것이 더 실현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단체도 당도 다른 여러 문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팍팍한 문제는 돈문제다. 시민단체들도 언제적 시작한 1만원 CMS가 매년 꾸준히 오르는 물가상승률에도 불구하고 여전이 줄지도 늘지도 않고 딱 그 1만원을 유지하고 있는가 말이다. 아마 처음 1만원 CMS가 보편화되기 시작할 때의 물가수준을 보면 지금은 한 2~3만원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회원 수가 획기적으로 늘지 않는 이상 작은 규모의 단체는 살림이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활동가의 곤궁한 삶은 여기서 출발한다. 단지 개인의 미래뿐만 아니라, 사회의 미래를 삶을 통해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싶다는 전망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직장을 다니면 아무리 박해도 200만원은 족히 받고도 남았을 젊음들이, 경력을 10년 쌓아도 몇 만원 오를까 말까 하는 전망을 안고 100만원 턱걸이 하는 금액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당연히 노후 대비나 하다못해 병이라도 나면 들어갈 병원비 조차 예비하지 못하는 인생이 되어버리는 게 흔한 일이다.



그리고 CMS로 무언가를 후원하는 분들의 숫자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듯하다. 말로는 잘한다고 하고 좋다고 해도 매달 자신의 수입 중 1%도 후원하지 않는 이들은 또 얼마나 얼마나 많은가. 심지어 한국에서는 활동 따위는 하지 않고 오직 모금만 하는 단체라도 네임벨류만 있으면 후원을 받기 쉽다는 얘기까지 듣노라면, 사람들은 누구나 알아들을 만한 그럴듯한 단체에 대한 후원은 종종 시작하곤 하지만, 정말 힘들게 목소리를 이어가고 있던 단체들은 폼 안난다고 외면받는 것 같아 영 입맛이 쓰다.


사회적인 투자로 봐도 후원 따위는 충분히 비용에 대한 값어치를 할 것이라 생각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노후 대비를 위해 매달 꼬박꼬박 보험회사에 갖다 바치는 돈은 물가상승률에 따라서 가치가 자연 하락하고 말지만, 그 반의 반만큼만 사회복지 이슈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단체를 후원하고, 보편적 복지의 확대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당의 후원금이나 당비로 납부를 하면, 노후대책이 효용을 발휘해야 할 즈음에는 이미 국가적인 복지제도를 통해 종신의 노후 복지를 보장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고보면 노동당도 참 어려운 살림이다. 그래도 정당이라고 그렇게까지 어려울까 싶을 수도 있지만 최근 들여다보니 잘 나가는 시민단체 보다 살림살이는 훨씬 더 빠듯하다. 한 달에 들어오는 수입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1억원은 올려다보느라 목이 꺾어질 정도인데, 그나마 국고보조금도 없으니 그야말로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한 기본적인 돈 자체가 부족한 실정이다. 그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당직자들이 당을 기둥처럼 받치고 있었구나 싶다. 

따지고 보면 국회에 수십석씩 의석을 가지고 있는 정당들도 오로지 당비 수입만 놓고 견주면 노동당과 별 차이가 없다. 아니, 오히려 영세한 것으로 안다. 국고보조금에 공천헌금으로 먹고 산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셈이다.


사람들은 살림살이 어려워져 눈물 머금고 CMS를 줄이고, CMS 줄어드니 단체들의 활동력도 줄어들거나 최소한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의 활동에 집중하기 힘들어진다. 어떻게 타계해야 할지 답을 찾기도 쉽지 않다.


쭈뼛쭈뼛 나오는 얘기가 후원금액 증액인데, 1만원이라도 고맙게 꾸준히 후원하고 있는 회원들에게 회비를 올려달라는 말을 하는 게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노동당도 최소 1만원 한도에서 수입의 1%를 당비로 내자는 내부 규정이 있지만, 시민단체들과 마찬가지로 CMS 출금액은 표준금액 1만원이 표준으로 인식되어 1만원 당비 비중이 가장 높다. 200만원 벌면 2만원, 300백만원 벌면 3만원 식으로 어쩌면 '성경적'인 갹출을 하자는 것인데, 쉽지 않아 보인다.


활동이 변변치 않다고 질타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의 십시일반으로 살림을 꾸려온 모든 조직은 매년 물가상승률만큼 침몰하고 있었다고 보면 어떨까. 저마다 월급은 어쨌든 오르는데, 후원금액은 오르지 않고 있으니 이 사회에서 각 단체와 정당의 지분은 그만큼 계속 깎여 온 셈이라는 셈법을 깨닫는 것 말이다. 물론 형편이 여의치 않은 월급 사정도 있겠지만, 물가상승률 0의 CMS에 비할 바는 아닌 듯 하다.


여기저기 가리지 말고 한꺼번에 CMS 표준금액 2만원 혹은 3만원 운동을 해도 모자랄 판이다. 형편이 어렵다면 그대로 두는 것만도 감지덕지이지만, 그렇게 빠듯한 살림이 아니라면 매달 CMS 후원 금액은 한 달에 한 번의 치맥값 정도에 맞춰도 무리 없지는 않을까.


몇 해 지난 후에 시원한 치맥과 함께 속 시원한 뉴스를 즐길 수 있는 시작은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김한울 (노동당 종로중구당협 사무국장)

* 이 글은 2014년 10월 20일, 노동당 서울시당 [칼럼]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seoul.laborparty.kr/474


판교 환풍구 붕괴 사고 이후로 여러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주로 책임소재를 두고, 안전에 대한 주의 멘트 등이 있었음에도 환풍구 위에 있다가 사고를 당한 희생자 본인의 책임이라는 주장과 안전요원 배치나 펜스 설치 등을 통해 통제했어야 했다는 주최측 책임론이 충돌한다.


1. 희생자 본인의 책임이라는 생각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주최 측이 좀 더 적극적인 현장 통제를 했어야 하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 수 차례 주의 멘트를 했다는 것은 사고 발생 이전에 안전상 위험요인이 있다고 주최 측은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위험요인을 인지하고 주의 멘트를 반복한 후에도 개선이 없으면 적극적인 조치가 일어나야 하는 것이 순리적이다. 하지만 주최 측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더불어 희생자 자기책임만 강조할 경우, 유사한 상황에서 주최 측이 경고 멘트만 하고 그에 따르는 실질적인 조치는 하지 않는 식으로 안일하게 대처하는 해이를 불러올 수도 있다.


2. 결과적으로 '주의 멘트를 반복하는 것 외에 실질적인 조치가 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에 대한 주최 측의 해명이 있어야 한다.



3. 건축을 좀 안다고 하는 분들은 쉽게 '어떻게 그 시설에 사람들이 올라가서 뛸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듯 하다. 건축과 관련한 모든 규제들은 그렇게 생겨나서 지금에 이르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건축물 설계에 있어 소방법에서 강제하고 있는 내용이 존재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런 규정이 없으면 건축가들은 화재 등 재난 상황을 일일이 시뮬레이션 해서 대응책을 수립해야 하지만 규정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경우, 건축 설계자는 그를 따르는 것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번에 사고가 났고, 평편하고 넓은 전망대와 같은 환풍구는 행사나 축제가 있을 경우 그 위로 많은 사람들이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는 계기로 봐야 한다. 그리고 환풍구 설치에 있어서 이러한 경우에도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누구도 안전기준 강화를 이야기하지는 않는 것 같다.


비용이 증가한다고? 세상의 모든 규제를 철폐하면 비용은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우리가 치르는 모든 비용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효과적인 대안이 꼭 비용이 엄청나게 증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하나? 미래를 사는 분들이신가?


4. 좀 생뚱맞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번 사고에 대한 의견들을 보노라면 진영적 자기 인식과 진영 방어 논리가 작동하는 것을 보게 된다. 스스로를 희생자, 주최측, 환풍구 설계자 중 어느 하나에 이입시켜서 그들을 두둔하고 방어하는 것에 급급한 식의 '입장 말하기'가 일반적이란 얘기다.


누구도, 사고의 발생 과정에서 그것이 '어느 단계'에서 '예측가능'했는지와 그에 대해서 적절한 '사전 조치'가 충분히 효과적으로 취해졌는지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 발생한 사고가 재발하지 않기 위해서 마련되어야 할 사고방지책 역시 '올라가지 말라면 올라가지 말아야 한다' 수준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그저 그들의 잘못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사고의 전개는 사실상 게으른 사고의 자기고백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사고 발생에 이르는 과정에서 그것을 막거나 희생을 줄일 수 있는 계기가 있었는지를 확인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얼마나 취해졌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며, 이번 사고를 계기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효과적인 대책을 수립하는 발전적인 논의가 가능해야 한다는 얘기다.


어쨌거나 가장 답이 없는 것은 '세상이 이 따위니 망해도 싸다'는 식의 염세주의다.


김한울 (노동당 종로중구당협 사무국장)

* 이 글은 2014년 3월 14일, 노동당 서울시당 [칼럼]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seoul.laborparty.kr/258


몇몇 분들은 아시겠지만, 서촌에서 세입자로 살며 용감하게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은 제게 고민이 생겼습니다. 어쩌면 이미 예견된 미래가 닥쳐온 것이죠. 끝끝내 전세를 놓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전세 보증금을 20%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전화를 받았거든요. 3년 전, 누하동 한옥에 살 때 이 동네 전세 보증금이 최소한 매년 1,000만원씩 오르는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지금 와서 보면 적중한 셈입니다. 아니, 사실은 그 보다 더 많이 오르고 있으니 좀 느슨한 예상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 당시 제가 살던 집의 전세는 평균 수준이었는데 지금 저는 서촌에서 가장 싼 전세집이나 마찬가지인 집에서 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예견된 미래라고 하는 이유는 이미 그 조짐이 오래 전 부터 있어왔기 때문입니다. 최소 십수년 자리를 지켜온 가게들이 죄다 물러나고 이제 수성동 계곡과 박노수 미술관이 있는 옥인길에는 자리 잡은 지 2년 이상 된 가게를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 박노수 미술관이 개관하면서 주변 땅값이 세 배나 뛰었다며 싱글벙글 하시는 종로구청장님의 연설을 우연히 듣게 됐는데 참 씁쓸했습니다.





동네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세탁소는 멸종위기에 몰렸고, 동네 중고등학생들이 몰려다니던 분식집들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나마 업종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에도 세입자를 내보내고 건물주인이나 그 가족이 운영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 듯 하고요. 구멍가게가 사라지더니 슈퍼마켓도 통인시장 주변 외에는 죄다 없어지려나봅니다. 서촌에 사는 사는 사람의 생활 환경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고 감수해야 하는 불편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얘깁니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는 사직단 복원 때문에 시립어린이도서관을 철거한다는 이야기까지 돌면서 서촌의 미래는 사람사는 동네가 아니라 관광지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하게 됩니다. 한 두 해 안에 쫓겨나는 재개발 철거민은 아니어도 10년 20년 두고 언젠가는 동네를 떠나야 할 사람들로 정해진 서촌 철거민 말입니다.


가게들이 이렇게 변하는데 집들도 마찬가지지요. 서촌이 미우나 고우나 정들어 살던 분들 조차 서촌을 어쩔 수 없이 등지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더 많아질테고, 그 중에는 저와 저의 가족도 포함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느낍니다. 이럴 땐 세입자란 정말 항상 추방당하며 살고 있는 존재 아닌가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동네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해보겠다고 해 봤자 집주인 전화 한 통이면 동네 분들과 작별인사하고 다른 동네로 짐을 싸야 하는 운명이니, 동네에 정붙이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어버리니까요. 그래서 집없는 설움이라 하는 거겠지만, 집 가진 자가 되기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게다가 지금 권리금 폭탄 돌리기라고 까지 얘기되는 가게 월세와 권리금 인상폭은 상식을 벗어난 수준입니다. 1~2년 전에 들어온 가게들이 장사에서는 밑지고 권리금으로 그 손해를 메꾼후 가게 주인 연봉 쯤 챙겨 나가는 게 성공적인 사례가 될 지경인 듯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달라는 권리금과 월세 주고 들어온 상인들이 오래 장사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서촌을 찾아오는 방문객을 탓할 수도 있겠지요. 사실 옛 풍경, 오래된 골목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왔다면서 잠시 앉아서 쉴 곳, 산책으로 시장기 도는 배를 채우는 곳은 모던한 인테리어로 깨끗하게 정리된 곳만 찾는 모습은 종종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 덕분에 월세는 오르는데 오래된 가게는 상대적으로 장사가 안돼서 가게를 접을 수 밖에 없게 되고 동네 풍경은 빠르게 바뀌어나갑니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싶습니다. 하지만 그리 알고 그리 하시는 분들이 한 분이라도 계실까요. 앞서서 제대로 알리지 못한 게으름을 탓할 일이지요.


장황하게 이야기를 풀어놓았는데, 가게든 집이든 제 발등에 불도 떨어지고 나니 뭔가 공론화가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의견이라도 들으려, 최소한 이런 일이 아무 이야기 없이 지나쳐지고 만다면 더 큰 설움이 더 많은 분들께 더 빨리 닥쳐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글을 적게 됐습니다.


각자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셔도 좋고, 문제점에 대한 나름을 생각을 제시하셔도 좋습니다. 좀 더 나아가 대안이나 대책을 말씀해 주실 수도 있고, 어쨌든 무슨 이야기든 좋습니다. 서촌 거주자가 아닌 분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적어주시는 것도 두 팔 벌려 환영합니다.


함께 이야기 해 보고 싶습니다.



김한울 (노동당 종로중구당협 사무국장, 서촌주거공간연구회 사무국장)

* 이 글은 2014년 4월 4일, 노동당 서울시당 [칼럼]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seoul.laborparty.kr/289



위가 구글어스 캡쳐, 아래가 조선일보가 4월 3일자로 공개한 무인기 촬영 사진(3월 24일 월요일 오전 9시 22분 2초 촬영)위가 구글어스 캡쳐, 아래가 조선일보가 4월 3일자로 공개한 무인기 촬영 사진(3월 24일 월요일 오전 9시 22분 2초 촬영)



조선일보가 공개한 사진에 대해 문제제기하던 국민TV뉴스의 보도가 편집자 검토로 들어가며 볼 수 없게 됐다. 사실 조선일보가 오보를 냈다고 한 국민TV뉴스의 기사가 오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공개한 사진이 어딘가 미심쩍은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불필요한 음모론이나 의심의 눈초리라면 모두 종북으로 몰아가는 무지막지함을 피하기 위한 몇 가지 사진 검증 포인트를 생각해봤다.


1. 촬영시각과 그림자의 각도를 확인한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무인기가 찍은 사진은 3월 24일 오전 9시 22분에 촬영된 사진이라고 했다. 해당 월일시의 그림자 각도는 정해져 있다. 그러니 실제 그 시각에 찍힌 사진인지 확인하려면 사진 속의 그림자 각도를 확인하면 된다. 사진에 나온 그림자들 중에서 가장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그림자는 청와대 사랑채 지붕선이 사랑채 앞마당에 늘어뜨린 그림자다. 건물지붕의 모서리가 그대로 마당에서도 확인된다. 지붕모서리와 그림자 모서리를 연결한 선을 긋고 방위 기준으로 각도를 재면 된다. 카메라 세팅 시각의 오차를 관대하게 감안해서 10분 정도의 오차를 허용한다고 해도 사진사에 나타난 그림자 각도의 오차 보다는 적을 것이다.


2. 서울시 버스운행 정보를 조회한다.


조선일보가 공개한 사진을 보면 시내버스가 딱 두 대 찍혀있다. 자하문터널에서 경복궁역 사거리 방향으로 진행하는 초록색 지선버스 두 대가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사거리 신호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하나 더. 형제마켓 앞 사거리에서 수성동 계곡 종점을 향해서 죄회전 중인 마을버스 9번도 동시에 찍혀있다. 마을버스 9번의 일반적인 배차간격을 보면 출근 러시아워를 조금 지난 시점임을 감안하더라도 사진이 촬영된 시간을 1분 이내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타이밍 정보를 제공하는 점이다. 3월 24일 오전 9시 22분 2초 주변 시각에 마을버스 9번이 칠성약국 정류장 도착 직전 시간구간을 확인하고 그 구간 내에 신교동 버스 정류장에 도착 예정인 버스가 두 대 이상임을 확인해 볼 수 있다.



3. 월요일 아침 오전 9시 22분의 자하문로 통행량


조선일보가 공개한 사진은 월요일 오전 9시 22분에 찍혔다고 했다. 출근시간을 조금 넘기긴 했지만 자하문로에는 교통량이 평소에 비해서는 많을 수 밖에 없는 시간대다. 자하문로의 교통량을 보면 통인동 사거리에서 경복궁역 방면으로 신호대기 중인 차량이 길어야 커피공방 앞까지 대기하고 있다. 그 뒤로는 거의 차량이 보이지 않다가 신교동 사거리에서 초록색 지선버스 두 대와 함께 차량 서너대가 신호대기하고 있다(그 전에 버스 두 대는 신교동 버스정류장 앞에 늘 대기중인 경찰 닭장차 두 대이니 제외하자). 역시 그 뒤로는 차량이 몇 대 없다. 다만 그 반대편 차선으로는 사거리를 빠져나간 차량들이 비교적 많이 보이는 편이다. 월요일 아침 9시 22분 경에 자하문로 통행량을 살펴볼 수 있겠고, 그날 유독 한산했다고 한다면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시내 교통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운영하는 CCTV 영상을 확보해서 자하문로에서 경복궁역 사거리에 진입하는 교통량을 비교해봐도 좋다.


이렇게 몇 가지만 확인해도 불필요한 의혹이나 다툼은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사진을 살펴 본 나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최근 보름 이내에 촬영된 사진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나, 통인시장 동측 입구 남쪽 두 번 째 건물을 보면 살짝 붉은 빛이 돈다. 새누리당 구의원 예비후보의 선거사무실 입주 건물에 건물을 덮는 현수막을 설치해 놓은 것이 아니면 건물 자체에서 붉은 빛이 나오기 어렵다. 그 옆옆 건물은 푸른빛이 나는데, 새정치민주연합 시의원 예비후보 선거사무실이 입주해있어 파란 현수막으로 건물을 덮은 탓이다. 두 선거사무실의 입주와 현수막 설치는 모두 3월 중순 이후에 이루어졌다.


둘, 통인동 46-5번지는 최근 철거됐다. 조선일보가 공개한 사진을 보면 해당 대지의 가옥을 철거한 후 인접 가옥의 외벽이 노랗게 드러나보인다. 3월 13일에 철거현장을 지나며 찍은 사진을 찾아봤더니 그 때 노란 포장재로 임시로 덮어둔 것이 확인된다. 며칠 전에 다시 봤을 때는 회색으로 마감시공을 끝냈으니 3월 23일을 전후해서 찍힌 사진일 개연성이 높다.


2. 300m 고도에서 촬영된 것은 아니다


인왕산 정상이 338미터, 북악산 정상은 342미터다. 구글어스로 살펴 본 청와대 본관의 지표는 70미터 쯤 된다. 조선의 보도에 따르면 무인기는 통일로를 따라 300m 고도를 유지했고 청와대 근처에서는 고도를 낮춰서 1초 간격으로 촬영했다고 한다. 인왕산 능선을 지났는지 북악산 능선을 지났는지는 몰라도, 능선에 있는 경비단 초소에서 눈높이로 확인할 수 있는 항로다. 첨단이 문제가 아니라 육안으로 제대로 살피지 않고 있거나, 무인기가 그 고도로 날지 않았다는 증거다.


게다가 조선일보가 공개한 사진을 보면, CANON 550D 에 번들 50mm 단렌즈를 부착하여 찍은 사진이라고 보기 어렵지 않나 싶다. 550D는 보급형 DSLR로 크롭바디다. 똑같은 50mm 렌즈를 사용하더라도 화각이 훨씬 좁게 찍힌다는 얘기다. 550D 의 CCD는 22.3mm x 14.9mm 이다. 화각 계산의 기준이 되는 CCD 대각선은 26.8mm. 화각은 0.5237 rad, 30도가 계산되어 나온다. 평면에서 수직으로 300m 뻗은 선의 끝에서 30도 각도가 포괄하는 최소 거리는 피타고라스가 알려줬다. 350m 정도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공개한 사진에 찍힌 범위는 대각선으로 1.6km를 넘는다. 550D에 50mm 렌즈를 장착해서 1.6km 범위가 찍히려면 몇 m 상공에 있어야 하는지 역산해보면 2.7km 가 나온다. 조선일보가 공개한 사진은 최소한 2km 이상 고도의 상공에서 찍힌 것이라는 계산이다. 


뭐가 진실일까? 조심스럽게 근거없는 예측을 해보자면, 조선일보는 비슷한 시기의 위성사진을 무인기가 촬영한 사진이라고 거짓말을 한거다. 이건 또 어떻게 확인하냐고?


렌즈는 저마다 고유의 왜곡을 가진다. 완전한 평면이 완전히 반듯한 가로선과 세로선으로 엮여 있는 바둑판 모양이라면, 렌즈로 찍은 사진은 그 평면이 조금은 휘어있기 마련이라는 말이다. 대충의 렌즈 종류는 물론, 렌즈 중심점이 정말 사진의 중심에 있는지도 확인 가능하다(원본 사진의 일부를 잘라서 내놓는 경우에는 렌즈의 중점이 이미지의 중앙에 위치하지 못한다). 광각은 그게 지극히 심해져서 사진 귀퉁이에 찍힌 사람의 얼굴이 크게 나오는 것이 바로 이 이유다. 조선일보가 공개한 사진의 왜곡된 평면값이 번들 50mm 렌즈의 왜곡과 일치하는 지 보면 된다. 이는 이미지 분석 전문가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날이 새도록 이렇게 장문의 글을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는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삼각함수까지 끄적여가며 쓴 이유는 청와대가 이번 무인기 건에 대해 맞대응으로 평양침투작전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뉴스 때문이다. 국정원 문서위조도 모자라 이젠 날조를 가지고 평양까지 간다하니 간담이 서늘하다.


김한울 (노동당 종로중구당협 사무국장)

이 글은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소식지 매거진 내셔널트러스트 30호 [내셔널트러스트 여행]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nationaltrust.tistory.com/107



장면 1. 현자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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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5024 by Kim Hanwool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무언가 찾아 집집을 찾아 헤메는 이가 서촌의 골목을 바삐 걷는다. 술 좋아하는 체부동 김씨와 바둑 좋아하는 누각동 김씨까지 찾아 가 봤지만 모두 허탕이었다. 해는 인왕산을 넘어 처마 밑으로 어둠이 피어나고 있었다. 며칠 공을 치니 마음은 더 급해졌다. 귓가에 거문고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누각동 이만호 집이 머리를 스친다. 김홍기가 거문고를 좋아하는 그의 집을 자주 찾는다는 이야기를 김홍기의 아들로부터 직접 들었다. 조용히 대문을 밀고 들어가 가쁜 숨을 고르며 거문고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묻는다.


“실례지만, 어느 분이 김노인이십니까?”


“여기에 김씨는 없소. 홍기를 찾나본데, 와도 예정이 없고 가도 언제 온다 않으며, 올 때는 하루에 두세 번도 오지만 오지 않을 때는 해를 넘기는 사람이오.”


날이 기울었으니 그가 다닌다 하는 집들을 물어서 다음 날에 기대해 볼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다음날, 다시 걸음을 서둘렀다. 그렇게 몇 집을 찾아갔을까. 지난 밤 술겨루기를 하곤 아침녘에 취기와 함께 먼 길을 떠났다는 답만 덩그러니 남았다.


김홍기라는 사람은 두루 세상의 이치를 꿰뚫고 있어 김신선이라고도 불리는 인물이다. 그를 찾는 이는 연암 박지원. 그의 지혜가 우울증에도 효험이 있다는 얘기를 마음에 새겨뒀다가 사람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신선은 찾지 못하고 만다.


서촌의 18세기 풍경을 아련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게 해주는 연암 박지원의 <김신선전(金神仙傳)> 내용이다.


조선의 지도를 들고 서촌의 골목을 걷다


연암의 <김신선전(金神仙傳)>은 체부동과 누각동에서 시작된다. 누각동은 누상동과 누하동의 옛 이름이다. 숨은 현자 김신선과 그를 찾는 박지원의 추적은 서촌의 골목 어디 쯤에서 엇갈리고 있었을까. 운 좋게도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


<도성대지도>는 조선의 서울을 가장 크고 세세하게 그린 지도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되었으니 <김신선전>의 인물들의 발걸음이 일으킨 먼지가 막 가라앉을 즈음이다. 붉은 선으로 길을 긋고 푸른 선으로 물을 그렸다. 물길을 덮은 아스팔트 아래로는 오늘도 청계로 향하는 물이 흐르고, 골목길을 덮은 보도블록 위로는 오늘도 서촌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18세기 조선시대 지도를 들고도 21세기의 골목길을 찾아 걸을 수 있는 곳, 바로 서촌이다.



[ 도성대지도(일부, 서촌) | 공공누리:문화재청 ]


지도를 보면 인왕산 아래 옥류동 물길 옆으로 구불구불 내려오던 골목길이 갑자기 한 곳에 모인다. 동네 밖으로 나갈 땐 모두가 만나는 곳이고, 동네로 들어설 땐 함께 들어와 흩어지는 곳이다. 길의 갈래는 다섯 갈래. 누하동 오거리다.


오거리는 조선시대 누하동 안의 작은 동네 이름들 중 하나로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다섯 오(五), 클 거(巨), 마을 리(里), 오거리(五巨里)다. 지금은 근처에 자리잡은 슈퍼마켓 이름으로 남아있다. 얼마 전까지는 마을버스 정류장 이름으로도 남아있었지만 서촌에 한옥마을이라는 이름이 덧씌워지면서 마을버스 정류장 이름에서는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서촌 사람들은 여전히 그 정류장을 오거리라 부른다.


누하동 오거리는 누하동, 체부동, 통인동, 필운동의 경계가 만나는 곳이다. 18세기 신선을 찾는 발길이 체부동에서 누각동으로 향했다면 지금의 누하동 오거리를 지나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오래된 골목, 그 길과 길이 만나고 흩어지는 곳마다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발걸음. 옛 사람들이 걷던 길을 그대로 우리가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살갗으로 느껴지는 역사의 깊은 호흡은 서촌이 간직한 시간의 숨결이고, 서촌이 시간을 담고 있는 방식이다.


장면 2. 단짝 친구의 선물


서너살 쯤 나이 차가 있어 보이는 두 아이가 오거리에서 인사를 나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한 아이가 몸이 불편하여 입학이 늦어진 바람에 둘은 동급생으로 몇 해를 지내며 둘도 없는 단짝 친구가 됐다. 함께 걷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끊어진듯 이어지다가도 통하는 듯 막다른 길이었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유년에 동네의 골목길을 탐험하듯 돌아 다니다 보면 길 잃고 헤메는 일도 더러 있기 마련이다. 둘은 그렇게 동네의 골목길을 함께 걷다가 헤어지곤 했다.


친구는 나무로 만든 그림도구 상자를 선물했다. 마음에 쏙 드는 선물에 마음이 들뜬 아이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별명을 ‘나무 상자’라는 뜻으로 지었다. 한자로 이상(李箱). 김해경이라는 본명 보다 직접 지은 이름을 더 자주 쓰게 된 것은 순전히 이 동네 단짝 친구, 구본웅 덕분이었다.


서촌의 시간은 길로 이어진다


한국의 툴루즈 로트렉이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한 서양화가 구본웅과 구본웅의 그림 <친구의 초상>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인 이상은 평생 친구이자 동네 친구였다. 누하동 오거리는 구본웅의 집과 이상의 집을 이어주고 있다. 그들이 걸었던 구불구불 막히기도 이어지기도 하던 골목은 이상의 시 <오감도>에 아해들이 질주하는 무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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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1275 by Kim Hanwool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20년 전에 새로 놓인 넓은 찻길을 피해서 골목으로 다니는 서촌의 아이들은 누하동 오거리에 익숙하다. 필운동으로, 누하동으로, 누상동으로, 통인동으로, 체부동으로 만나고 갈라지는 오거리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인사가 더 빈번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누가 알까. 지금도 일생에 남을 선물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우정을 키워가고 있는 어느 미래의 시인과 화가가 저 오거리를 지나고 있을지 말이다. 그렇게 서촌의 골목은 옛 이야기에만 머물지 않고 오늘의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 서촌이 시간을 이어주는 방식이다.


장면 3. 캔버스를 들고 오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전쟁의 포화에도 불구하고 불행 중 다행으로 서촌에는 폭격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오거리는 마치 언제 전쟁이 있었냐는 듯 평화로웠다. 캔버스와 물감을 들고 오거리를 지나는 화가의 마음을 예외로 한다면 말이다.


고향 떠난 고된 피난 생활이 결국 가족을 갈라놓았고, 그 후로 홀로 전국을 전전하다가 휴전 이듬해, 누상동의 고향 선배 집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가족과 다시 한 집에서 살 수 있는 방편의 하나로 개인전을 준비하기로 한 것이다. 가족과 그림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던 그의 발걸음은 재회의 희망에 부풀어 한결 가벼웠을 것이다. 그 마음을 담아 그린 작품에 <도원>과 <길떠나는 가족> 같은 제목을 붙였다. 가족과 함께하는 행복한 시간과 피난 가던 때를 화폭에 옮긴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이중섭이다.


삶과 예술이 이어지는 시간의 교차로


누하동 오거리에는 수많은 화가들의 이름이 수놓여있다. 전쟁이 끝나고 속속 서촌으로 화가들이 모여든 것이다. 피난 시절, 이중섭과 함께 부산에서 단체전을 열었던 이봉상 화백의 집은 누하동 오거리에서 몇 걸음 안되는 곳이다. 이봉상 화백과 누하동 오거리를 사이에 두고는 천경자 화백도 자리를 잡았다. 이중섭, 이봉상과 부산에서 함께 단체전을 열었던 한묵 화백도 곧 이웃이 되었다. 누하동 오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만나고 인사하며 그림을 이야기 했을 전후 서양화가의 발자취가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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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5010 by Kim Hanwool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서촌엔 이미 당대 최고의 동양화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청전 이상범 화백은 이미 오래전 누하동에 청전화숙을 열어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고 있었다. 그의 스승은 심전 안중식이었고, 심전의 스승은 오원 장승업이었다. 시상대 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도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던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우는 작업을 맡았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은 후 언론사를 나와 후진 양성에 더욱 힘을 쏟고 있었다. 그의 집에 하숙을 하던 이 중에는 10대의 박노수도 있었다.


미술관 전시를 통해서만 만나던 이름들이 누하동 오거리를 만나면 살가운 이야기들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같은 곳에 출퇴근을 하던 이들 중에 독신이었던 한묵 화백은 이봉상 화백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 일이 잦았고 종종 천경자 화백의 집에서 끼니를 신세지기도 했다. 출근길에 누하동 오거리를 지나 이웃집에 들러 아침밥을 먹는 풍경에서 화가는 예술가 이전에 동네 삼촌이다. 언제든 달려가서 고민을 털어놓고 위안을 주고 또 받던 이웃들이 누하동 오거리를 오가며 이웃의 정을 쌓아온 것이다.


천경자 화백이 살던 누하동 집은 예술가 몇몇이 아뜰리에로 사용하고 있고, 곳곳에 화가들의 작업실이 있다. 오거리를 통해 오가며 정을 나누는 이웃 사이는 지금도 오거리에 서면 가던 길 멈춰 서서 한참을 이야기 나누는 동네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대로 다시 찾아 볼 수 있다.


시간의 골목, 시간의 교차로


서촌을 살다 간 이들의 이름을 모두 꼽으려면 숨이 차오를 정도다. 시인 노천명은 천경자 화백이 오거리를 오가며 인사를 나누던 사이였다. 노천명 시인의 집 맞은 편에는 염상섭의 생가가 있었다. 같은 나이의 수주 변영로가 신교동에 살았다 하니 통인동 골목으로 오거리를 지나 친구의 집으로 향하는 장면도 떠올려 볼 수 있다. 김복진과 이여성은 당대 얼마 되지 않는 대표적 예술인 독립운동가로 두 사람의 집을 잇는 길 역시 누하동 오거리가 된다. 이여성은 청전 이상범과 함께 전시를 열었고, 김복진은 구본웅에게 조각을 가르쳤다. 



[ 누하동 오거리 지도 | 서촌주거공간연구회 ]


그 무수한 이름들이 누하동 오거리에 놓이는 순간 우리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역사 속 아련한 인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길, 이 거리를 지금도 걷고 있는 누군가 처럼 느껴지는 경험 말이다. 구불구불 복잡하게 그물처럼 얽힌 골목처럼 시대의 이름들이 골목으로 얽히며 시간의 살아있는 숨결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누하동 오거리, 골목의 숨결을 이어가는 방법


누하동 오거리에는 오래된 건물이 얼마 없다. 올해로 상수(上壽)를 맞은 한묵 화백이 50년 전에 살던 누각같은 2층 집도 지금은 자취를 알 수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 길이 아직 남아있다는 점이다. 재개발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가면 집은 물론 길까지 모조리 흔적없이 사라지는 시대에 조선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역사의 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는 길이 남아있고 그 길을 오늘도 이야기를 이어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문화유산이라 하면 고색 창연한 건축물만을 떠올리며 그 안을 드나들던 사람들이 걷던 길과 그 위에 놓여진 이야기의 호흡은 자칫 놓쳐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누하동 오거리는 오래된 건물 보다는 오래된 길과 이야기를 읽는 눈을 불러낸다. 그 눈으로 역사 속의 이야기와 오늘의 삶을 함께 읽어낼 때, 우리의 삶 자체도 문화유산과 함께 빛을 발하는 살아있는 역사로 새겨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 서촌주거공간연구회(최문용) ]


오늘의 서촌이 답해야 할 물음은 여기에 있다. 보존과 복원이 개발의 다른 이름으로 돌아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 않는 것들을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으로 새로 만들어 세우는데 급급한 지금,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숨결은 숨결 그대로 이어가는 노력과 자세에 대한 것 말이다.


과거의 발걸음이 오늘의 발걸음으로 이어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있는 역사와 살아있는 문화유산을 누릴 자격을 가지게 되는 건 아닐까. 서촌을 수놓은 수많은 이름과 이야기들이 서로 만나고 교차하는 누하동 오거리에 오늘의 삶 역시 교차하고 있는 것 처럼, 시간의 교차로 누하동 오거리는 예전과 같이, 오늘도 여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쓰여지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참고문헌

  1. 연암집(燕巖集) 제8권 별집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연도미상 (한국고전종합DB)
  2. 천경자, 思友 잊을수 없는 그때 그친구 <16> 千鏡子 <東洋畵家> (6) 萬年청년 韓默씨, 경향신문, 1979.10.3.
  3. 김창희, 서촌의 형제들이 꾸었던 꿈 진보적 민족주의자의 길 - 1, 레디앙, 2013.4.23.


개발의 뒤안에서 시간을 퇴적해온 도시,  서촌


비 오는 아침과 눈 내리는 낮, 저녁의 석양과 새벽의 달빛, 이같이 그윽한 삶의 신선 같은 정취를 바깥세상 사람들에게 말해주기 어렵고, 말해주어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서촌 1. 역사 경관 도시조직의 변화, 서울역사박물관, 2010).


중인 신분으로 조선 후기를 살았던 학자 장혼이 글로 남긴 인왕산 아래의 동네 풍경은 지금의 것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대로이다. 인왕산과 경복궁 사이에 자리 잡은 서촌은 오래된 동네다. 장혼이 태어나던 무렵에 제작된 도성대지도를 펼쳐 보아도 지금의 골목길과 견주어 길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길의 모양이 그대로라면 땅의 모양도 크게 바뀌는 일 없이 전해 내려왔으리라 추측해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전문 기술직이 많았던 중인 계급이 주로 터를 잡고 살던 동네라 다닥다닥 처마가 맞닿은 필지의 크기도 작은 편이다. 개발이 온 나라를 휩쓸던 때에는 오히려 청와대 근처라는 이유로 개발에서 소외되어 우연히도 옛 모습을 보존하게 되었다. 인왕산 비탈에서 내려다보면 시내의 높은 건물들이 일제히 고개를 떨어뜨리는 곳,  낮은 주택들이 모여 있는 사대문 안에 몇 안 되는 오래된 주거지가 바로 서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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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서촌 전경 · 김한울 찍음 / _IMG_0084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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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서촌 전경 · 김한울 찍음 / _IMG_8202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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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서촌 전경 · 김한울 찍음 / _IMG_1255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에 약속된 아파트 재개발은 개발 제한으로 낙후된 동네가 불만이었던 주민들에게는 장밋빛 미래였지만, 오랜 시간을 이어온 동네의 모습에 애착을 가진 주민들에게는 위기이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서울시의 북촌 한옥보존 정책이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서촌도 한옥 보존으로 방향을 선회하며 옛 모습을 유지한 채 낙후한 환경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정도 600년을 외치지만 어느 하나 수백 년을 헤아리는 것이 변변치 않은 서울에서 최소한 300년은 족히 넘게 이어온 골목길을 품고 있는 일반 주거지가 어떤 의미일까를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지켜낸 일은 천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동네 주민들이  ‘동네’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다

그렇다고 모든 걱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땅을 깎아 시간의 켜를 들어내고 콘크리트를 퍼부어대는 참극은 면했다지만, 옛 효자동 전차종점을 같이 써오던 이웃 동네 북촌과 삼청동이 불과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다른 세상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잠시 쓰레기봉투라도 내놓으려 대문을 열어도 큼직한 카메라를 든 외지인들과 눈을 마주치게 되는 일이 예사라면 정든 동네라도 견디기 쉬운 일은 아니다. 견디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는 북촌과 삼청동 이웃을 지켜본 서촌 주민들은 동네에 새로 들어서는 카페 하나도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낡은 집들을 헐고 아파트를 지어 올리는 재개발이 아닌, 나고 자란 삶의 터전을 가벼운 구경거리로 전락시켜 토착민들을 쫓아내는 새로운 종류의 재개발이 등장한 셈이다. 게다가 서울시의 한옥보존 정책이 무색하게도,  구청은 단층 한옥 바로 옆으로 고도제한 20미터에 맞추어 7층 건물 신축을 허가하는 상황까지 반복되고 있다.  최악은 면했지만 차악도 최악 못지않은 것이다.


서로 지나며 인사하던 이웃들 사이에 걱정이 오가고 여기에 공감하는 이웃들이 늘어나면서 함께 모여서 얘기해보자는 제안이 나왔다. 모임 날짜가 정해지고, 알음알음 함께 걱정할 수 있는 이웃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모이는 자리도 옛 재개발 추진위 사무실 자리에 새로 문을 연 카페로 정해졌다. 그렇게 첫 자리가 만들어지고 혼자 혹은 둘이 하던 생각과 이야기들을 여럿이 공유하면서 모임을 결성하는 데에까지 뜻을 모으게 됐다. 처음 모인 지 한 달 만인 2011년 6월 5일, 조촐하게나마 창립총회를 통해 회칙을 채택하고 임원을 선출하면서 시작된 것이 지금의 ‘서촌주거공간연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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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최근 서촌에 생기는 높은 건물들 · 김한울 찍음 / _IMG_1485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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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최근 서촌에 생기는 높은 건물들 · 김한울 찍음 / _IMG_1504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서촌주거공간연구회

우선 모임을 시작하게 된, 건물 신축 문제부터 풀어보고자 했다. 문제는 쉽지 않았다.  여러모로 대책을 찾아봤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구청의 소극적인 자세가 바뀌지 않는 한 상황이 변화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한옥보존 정책과의 괴리 문제, 도시 경관의 문제 등의 이야기는 이미 처음부터 소용없는 것이었다. 사이좋게 옹기종기 모여 있던 지붕들은 높은 건물 발치에 엎드린 듯 납작하게 붙어 있는 모양이 되고 말았다.


이웃의 풍경이 동네에 대한 애착의 밑거름이 되고, 그러한 삶의 환경을 지키며 살아가고 싶은 희망이 ‘건축법상 하자 없음’이라는 한마디로 더 이상 변호될 수 없는 상황에서 서촌주거공간연구회(약칭 ‘서주연’)는 동네의 가치를 변호하고 지켜낼 수 있는 내용과 실천을 고민하기로 했다. 또한 각각의 집과 가정이 아니라 그 개개가 함께 모여 이루어진 동네로서, 서로가 서로에 기대어 있는 삶의 공동체로서 마을을 인식하고 가꾸어나가는 것이 개개의 주민에게도 중요한 가치를 제공한다는 공감대 속에서 동네의 가치를 발굴하고 일구어나가는 데 뜻을 모았다.


처음과 같이 2주 간격으로 모임을 꾸준히 이어나가는 것은 자연스럽게 원칙처럼 자리 잡혔고, 모임이 열리는 장소는 마침 동네에 사무실을 두고 있던 시민단체에서 제공해주기로 했다. 동네 주민들이 모이는 모임인 만큼 다른 약속이 없는 일요일 저녁 시간이 회의 시간으로 고정됐고, 정기적인 모임을 카페 등에서 전전하는 것에 비해 휴일 저녁의 빈 사무실을 활용하는 것이 맞춤했다. 동네 커뮤니티 활성화를 위해 주민들에게 조건 없이 열려 있는 커뮤니티 공간의 안정적 공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얼마 되지 않는 모임의 경험으로도 충분히 체감할 수 있었다.


함께 나누는 시간과 이야기가 많아져야

안정적인 모임 장소가 제공되는 가운데, 활동의 범위도 천천히 늘어갔다. 철거를 앞둔 한옥을 지키기 위한 활동이 그 뒤를 이었고, 겸재 정선의 그림을 토대로 복원한다던 ‘수성동 계곡’에 엉뚱하게도 축대를 쌓아올리고 있는 현장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냈다. 육아 환경에 대한 고민이 막 시작되던 때에는 마침 동네의 어린이집 중 한 곳에 문제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상황에 도움이 되고자 머리를 맞댔다. 과정에서 서울시의 국공립 어린이집 확대가 숫자 늘리기에 급급한 채 얼마나 졸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나기도 했다. 정기적으로 동네 골목을 청소하러 다니고, 동네를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구경거리로 좋은 동네가 아니라 다양한 삶과 시간의 향기가 스민 채 역사와 삶이 공존하는 공간으로서의 동네 골목길을 안내하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주제를 접하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저마다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다르게 피부에 와 닿던 삶의 문제가 하나하나 마치 나의 문제처럼 절실하게 다가오는 경험은 동네 모임의 활동을 통해 회원들 사이에 공유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소문으로만 듣고 흘리던 일들, 동네를 지나면서 머릿속으로만 되뇌던 물음표로 끝났을 이야기들이 모임을 통해 이야기 나누어지고, 의견을 모아 행동으로 이어나가는 과정을 통해 동네는 좀 더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결국, 동네가 살기 좋아진다는 것은 관에서 예산을 많이 투여하는 동네나 낡은 집을 허물고 새 집을 말끔히 지어 올린 동네가 아니라,  그 동네에 살고 있는 이들 스스로가 자신의 동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관심을 기울이며 서로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는, 어찌 보면 당연한 진실을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깨닫게 된 셈이다.


낡은 인식과 자세는 큰 장애

어려운 점도 적지 않다. 모임에 참여하는 주민의 수와 활동의 빈도가 늘어나면서 휴일 저녁의 빈 사무실로는 공간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점이나 주민단체를 대하는 구청의 관료적이고 비협조적인 태도 등은 언젠가 풀어야 할 어려운 숙제로 남겨져 있다. 게다가 관에서는 북촌과 삼청동을 바라보는 서촌 주민들의 우려스러운 눈빛은 아랑곳없이 날로 관심이 집중되는 서촌에 대해 관광지 개발의 관점으로만 접근하며 새로운 것, 근사한 것으로 옛것을 대체하는 사업만 남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저마다 사는 사람이 자유롭게 부르면 그만인 동네 이름을 굳이 ‘세종마을’이라 새로 지어 붙이고선 ‘서촌 금지령’까지 내리는가 하면, 조선시대부터 시작되어  ‘내자시장’  등으로 불려왔던  ‘금천교시장’이란 이름도 제 마음대로 ‘세종마을음식문화의 거리’라는 새 이름으로 바꿔 붙이고 있다. 주민들이 부르는 동네 이름을 지우려는 관의 행태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주민으로서 열심히 의견을 모아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여전히 경직된 자세를 버리지 못하는 행정이 결국 마을의 진화에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동네란,  마을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불쑥 살고 있는 동네의 의미를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2년 만에 돌아오는 임대차 계약 만료 때마다 고민에 빠지는 보통 사람들에게 동네는 집값과 통근 거리에 따라 정해지는 것 정도이지 않을까? 이사 갈 곳을 찾다 보면, 도시는 어느새 시간과 비용의 공식에 따라 모든 것이 정해지도록 프로그램된 거대한 기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부동산에 있어서 시장경제가 실현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어느 한 곳에 정주하는 삶을 누릴 권리나 동네를 선택한 권리는 집값 혹은 보증금이라 이름 붙여진,  경제적 여유만큼만 주어지는 것이니 말하자면 가격표가 붙어 있는 권리인 셈이다.


도시를 떠도는 삶에서 동네를 고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동네를 가꾸는 일에 힘을 보태고 있는 처지에서도 날로 높아가는 임대료는 또다시 언젠가 정 붙인 이 동네를 떠나야 하는 현실로 내게 닥쳐올 가능성이 높다. 때가 되면 떠나야 하는 세입자로서 일부러 동네에 정 붙이지 않는다는 누군가의 말이 다시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어쩌면 이러한 악순환 속에서 우리는 동네를 잊고 살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정주의 권리를 매매의 대상이 아닌 기본적인 인권의 차원에서 들여다보고 고민해봐야 한다.


마치 유목민처럼 때가 되면 떠나야 하는 도시민들의 삶에서 ‘동네’는 사치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도시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으려면 다시 ‘동네’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동네를 재발견하고 이야기하며 동네의 가치를 힘써 끌어올리지 않는 한, 시간이 돌아오면 땅에 박힌 뿌리를 스스로 뽑아내어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하는 끝없는 이주의 삶을 얼마나 더 반복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1번지라는 종로가 말이 시내지 시골읍내같지 않느냐면서 한탄하셨습니다.”


2012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동네를 돌아다니던 한 예비후보가 SNS로 전한 메시지는 흥미롭게도 조선후기 중인문학의 주요인물로서 조선후기를 살다 간 장혼(張混, 1759~1828)이 서촌(옥류동, 현재의 옥인동)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연상케 한다.


“물줄기가 모인 곳을 젖히고 들어가면 좌우의 숲이 빽빽하게 모여 있고, 그 위에 개와 닭이 숨어 살며, 그 사이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았다. 옥류동은 넓지만 수레가 지나다닐 정도는 아니고, 깊숙하지만 낮거나 습하지 않았다. 고요하면서 상쾌하였다. 그런데 그 땅이 성곽 사이에 끼여 있고 시장바닥에 섞여 있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아끼지는 않았다.”[서촌. 1, 역사 경관 도시조직의 변화(서울역사박물관 편, 2010) 중]


‘사대문의 중심인 종로에 이웃하면서도 시골 같은 동네’라는 말은 200년 전은 물론, 2012년 오늘날에도 여전히 서촌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셈이다.

서촌의 골목길도 200년 이상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최초의 근대 지도라는 한성부지도(漢城府地圖, 1902)는 물론, 18세기의 한성을 가장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도성대지도(都城E大地圖)에서도 오늘날 서촌의 골목길 형태를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길썰미만 있으면 조선시대 지도를 펼쳐놓고도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표시할 수 있고, 찾아갈 수 있는 동네라는 이야기다.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 ⓒ 문화재청


길이 변하지 않는데 집자리만 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집자리와 길자리를 모두 밀어버리는 재개발이 아닌 한에야 길이 그대로라면 그 길을 통해 닿았던 집자리의 모양도 크게 달라질 수 없음을 쉽게 짐작해 알 수 있다. 1910년에 시작된 일제의 조선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처음 만들어진 지적도를 보아도 지금의 지적도와의 차이점을 찾아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주로 관청이 소재하던 서촌에 본격적으로 주거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계급에 따라 주거지가 구분되면서 중인을 비롯한 이서계층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부터로 알려져 있다. 양반도 천민도 아니었지만 전문지식과 기능을 갖추고 있던 중인계급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계급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골목문학’이라는 뜻의 위항문학(혹은 여향문학)의 대표격인 시인 공동체 ‘옥계시사’도 서촌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단원 김홍도는 이들의 모임을 그림으로 그렸고, 추사 김정희는 이들 모임을 위해 ‘松石園’(송석원)이라는 글자를 써서 바위에 새겼다.

옛 모습을 이어가던 서촌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1930년대이다. 경제공황이 휩쓸고 간 후, 경기가 다소 회복되면서 경성으로 지방민들이 급격히 유입됨과 동시에 부동산 경기가 활황을 맞는다. 폭발하는 주택 수요에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던 집이 팔리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20평 내외의 땅에 10평 내외로 지어진 근대 도시형 한옥이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북촌, 서촌을 막론한 경성 전역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은 250년을 내다본다는 ‘대경성 도시계획’이라는 이름으로 경성이라는 도시 전체를 술렁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당시 개발 과정에서 큰 필지를 나누어 대량으로 공급됐던 한옥들은 지금도 곧게 뻗은 골목 양쪽으로 늘어선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1930년대의 대량주택공급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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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M0014_33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해방 이후, 이완용과 윤덕영이 소유했던 거대한 땅과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집들이 비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전쟁으로 피난민이 유입되면서 서촌은 좀 더 비좁아진다. 경제개발시대에 상경한 지방민에 청계천 복개 공사로 집을 잃은 사람들까지 일부 서촌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판자집은 늘어나고 한옥집은 칸칸마다 한 가구씩 사는 집도 적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주거 환경이 열악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남파된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눈앞에 두고 진압되었던 청와대 습격사건은 서촌에 긴 인내와 고통의 시간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청와대에 인접한 동네라는 이유로 집을 고치려면 허락을 받아야 하고 지붕에라도 올라가면 경호원이 쫓아왔다는 주민들의 생활은 계엄령이나 긴급조치 처럼 얼마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개발의 엔진 소리가 드높을 때에도 서촌은 그로부터 비껴져 남겨지게 된 것은 분단의 현장이 천혜의 자연으로 돌아온 비무장지대를 연상시키게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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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0138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촌은 가장 큰 변화를 겪게 된다. 1992년, 인왕산에 맞닿은 누상동이 노후불량주택 밀집지역이라는 이름을 달고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지정되고, 1994년에는 지금 서촌을 관통하고 있는 필운대로에 대한 계획이 추진되기 시작한다. 신교동에도 좁은 길 사이로 빌라가 들어선다. 당시에 빌라를 짓기 위해 주택을 허무는 과정에서 기와집이 헐리는 것은 물론 초가집들도 대거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달동네라는 이유로 인왕산과 맞닿은 동네를 중심으로 사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오히려 큰 도로에 가까운 체부동, 누하동, 통인동에는 기와집들이 많이 남게 된 것은 이러한 전후를 알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근래 들어 서울시의 한옥보존 정책과 맞물려 누하동, 체부동을 중심으로 한옥수선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주거환경개선’이 반드시 기존의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운 복층 건물을 지어야만 하는 것이었는지 생각해 볼 문제가 될 것이다.

커다란 변화를 여기에서 마무리하는 것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서촌의 골목에는 재개발을 외치는 고함소리가 드높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 때에 약속한 체부동, 필운동, 누하동, 옥인동 재개발과 오세훈 서울시장의 한옥보존정책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한옥보존을 조건으로 더이상 재개발이 진행될 수 없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아직도 열악한 주거환경과 한옥보존의 갈등은 잦아든 불씨로 남아있다. 옥인동 재개발의 경우, 아직 불씨가 꺼지지 않은 채 뜨거운 입김을 내뿜고 있다.

시내를 걸으며 고층 건물 발치에 조용히 놓여있는 표석을 읽는 것만으로 역사 속의 사건이나 장소를 상상할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다. 어느 누가 살던 집, 어느 누가 걷던 골목은 그러한 앙상한 기록에 생생한 숨을 불어넣을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이것은 비단 흔히 생각하는 거창한 ‘역사’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이 동네를 살았던 어느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풍경은 단순히 오래된 것으로써의 가치가 아니라 그 시간의 심연에서부터 지금까지 유구하게 켜를 쌓아온 퇴적의 산물이고 시간의 증거로써의 가치를 지닌다. 서촌은 그래서 재현될 수도 모사될 수도 없는 그 자체로 기원, 즉 오리지널이 되는 동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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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1255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서촌은 한성 도읍의 서쪽 동네라는 뜻으로, 인왕산 아래에 있는 동네를 부르는 말입니다. 동이름으로 꼽자면 가장 유명한 효자동부터, 청운동, 궁정동, 창성동, 신교동, 옥인동, 통인동, 누상동, 누하동, 체부동, 통의동, 필운동, 사직동, 내자동, 적선동까지. 서울 도시철도 3호선 경복궁역에 가까운 동네라고 하는 것이 가장 알기 쉬운 설명이 될 것입니다. 요즘에는 북촌 한옥마을이 유명해진 덕분에 경복궁 동쪽이 북촌이고 서쪽이 서촌이라고 쉽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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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1275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서촌이라는 이름이 언제 처음 붙여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에 동서분당으로 ‘동인’과 ‘서인’이라는 이름이 생겨날 때에 서촌에 사는 사람이 많은 쪽을 서인이라 이름 붙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적어도 수백년은 된 이름일 것입니다. 조선의 가장 대표적인 활터 다섯 군데인 서촌오사정(西村五射亭)이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 필운동, 삼청동에 걸쳐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 우리가 ‘서촌’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부르기 시작하는 동네가 조선시대에 부르던 범위와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름만 오래된 것이 아닙니다. 조선시대 한성 지도를 펼쳐보실 기회가 있다면 지금의 서촌 일대 지도와 함께 번갈아 보며 비교해보세요. 20년 전에 새로 난 길을 빼고 보면, 조선시대 지도의 길이 지금도 그대로 골목으로 남아있는 곳이 서촌입니다. 골목 바닥에는 블럭이 깔리고 담장은 개량 한옥의 붉은 벽돌이나 일식가옥, 때로는 빌라로 바뀌었어도, 조선시대 서촌 사람들이 걷던 길 모양 만큼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골목길 만이 아닙니다. 경복궁역에서 자하문터널까지 이어지는 큰 길은 ‘백운동천’이 흐르던 물길 따라 길을 낸 탓에 폭이 일정하게 직선으로 뻗은 도로가 아니라 좁았다 넓어지곤 하는 구불구불한 8차선 도로가 되었습니다. 인왕산에서 뻗어 내려온 능선과 골짜기를 경계삼아 작은 동네가 갈리는 이유로, 앞서 꼽아본 것 처럼 서촌에는 법정동만 열다섯 개에 이릅니다. 골짜기 따라 사람들이 다니던 자취가 골목이 되었고, 골목 끝에 닿았던 스무평 남짓한 자그마한 집자리들이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함 없이 그대로입니다. 모양 뿐 아니라, 굽이굽이 걷다보면 골목 모퉁이 너머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도, 골목 어귀마다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것도 예전 그대로 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각종 전문기술을 가지고 있던 중인 계급의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옥인동 재개발구역으로 더 많이 알려진 송석원 일대는 조선의 중인문학으로서 ‘골목문학’이라는 뜻의 위항문학(혹은 여향문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 곁으로는 겸재 정선이 살던 인곡정사가 있었고, 겸재는 지금의 마을버스 종점에 있는 수성동 계곡과 송석원이 있던 옥류동을 그렸습니다.

이런 것을 동네의 내력이라고 하는 것인지, 시인 이상이 태어나서 성장했고 시인 윤동주가 소설가 김송의 집을 찾아 하숙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청전 이상범, 박노수, 노천명, 이중섭, 구본웅, 천경자, 김동진 등 길을 걸으며 꼽게 되는 예술가의 이름만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온전히 품고 간직해온 동네의 비결은 안타깝게도 밝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못됩니다. 군사독재 시절 내내 청와대에 가장 가까운 동네라는 이유로 아궁이라도 고치려면 신고를 해야 했고, 옥상에 빨래라도 널러 올라가면 경호원이 쫓아왔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집니다. 수십년 동안 불편을 감수하고 견뎌온 시간이 결국 다른 동네의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밑거름이 된 셈입니다.

이런 서촌에 처음으로 찾아온 개발의 파도는 골목과 집들 가운데로 아스팔트 길을 내고 주거환경정비구역 지정으로 초가집과 기와집이 헐린 자리에 빌라가 들어서던 1990년대입니다. 산업화 시대에 서울로 밀려들던 인구에 더해 청계천 복개로 쫓겨온 사람들까지 들어오면서 초가집 칸칸이 한지붕 여러가족으로 사는 집이 흔했을 정도로 열악했던 주거환경을 생각하면, 개발이라고 해서 마냥 눈살 찌푸릴 일 만은 아닌 듯도 하지만, 동네가 옛모습을 가장 많이 잃어버린 때가 이 때였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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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1513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그 다음 파도는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왔습니다. 아직도 구역지정이 해제되지 않고 있는 옥인동, 누하동, 필운동, 체부동에 아파트가 들어선 조감도가 동네 곳곳에 붙고, 건설사의 명절 인사 현수막이 내걸리던 때가 불과 몇 년 전입니다. 재개발을 앞두고 어차피 헐릴 집이라는 이유로 수리를 미루던 집들은 그 몇 년 사이에 부쩍 낡아버린 탓에, 여름에 폭우가 지나간 동네엔 무너진 집을 세고,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집 안에 텐트를 치는 집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서울시의 한옥보존 정책으로 그나마 근래에는 집 고쳐짓는 소리가 잦아지고 있긴 하지만, 이미 낡아버린 집과 아직 재개발이 포기되지 않은 채 갈등을 겪고 있는 옥인동 재개발 구역은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이제 새로이 덮쳐오고 있는 새로운 파도는 상업화와 관 주도의 테마파크화입니다. 삼청동과 북촌은 이미 ‘삼청동화’, ‘북촌화’라는 말이 통할 정도로 동네사람 누구나 걱정하는 나쁜 선례가 됐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삶은 아랑곳 없이 오래된 골목과 옛 향수를 자극하는 동네의 모습만을 구경하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만을 위해 문을 연 상업시설들은 동네를 지켜온 주민들에게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가게가 늘어나면서 부동산 시세가 들썩이면 결국 주민들은 쫓겨나야 하는 운명에 놓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똑같이 동네를 보러 오더라도 동네 사람들이 운영하는 가게를 더 많이 이용하고, 동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더 나은 동네를 위한 고민을 함께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됩니다.

여기에 더해, 관에서는 북촌 한옥마을 조성을 본따 동네 곳곳에 가득한 유명인들의 자취를 기념관으로 되살리고 격식 높은 기와지붕으로 동네를 테마파크화하려는 계획을 하나씩 실행에 옮기고 있습니다. 동네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예술가들의 이름을 이용해서 동네 사람들이 삶을 일구던 공간에 사람이 살지 않는 기념관과 전시관을 조성하려는 계획은 동네에 살고 있는 입장에서 그다지 반길 만 한 소식으로 들리지는 않습니다.

서촌은 낡은 동네이지만 또한 시간을 품고 있는 동네이기도 합니다. 삶을 부정하고 개발이익을 쫓는 광풍에서 비껴있던 개발의 비무장지대 같은 동네였습니다. 하지만 집을 헐고 땅을 깎아 아파트를 지어올리는 재개발이 서촌의 일부에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고, 다른 곳에서는 동네를 지켜온 삶의 자리를 뒤흔드는 또다른 얼굴을 한 재개발도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서촌은 우리가 개발의 시대를 지나오며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질문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도시의 모습인가에 대한 질문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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