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1번지라는 종로가 말이 시내지 시골읍내같지 않느냐면서 한탄하셨습니다.”


2012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동네를 돌아다니던 한 예비후보가 SNS로 전한 메시지는 흥미롭게도 조선후기 중인문학의 주요인물로서 조선후기를 살다 간 장혼(張混, 1759~1828)이 서촌(옥류동, 현재의 옥인동)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연상케 한다.


“물줄기가 모인 곳을 젖히고 들어가면 좌우의 숲이 빽빽하게 모여 있고, 그 위에 개와 닭이 숨어 살며, 그 사이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았다. 옥류동은 넓지만 수레가 지나다닐 정도는 아니고, 깊숙하지만 낮거나 습하지 않았다. 고요하면서 상쾌하였다. 그런데 그 땅이 성곽 사이에 끼여 있고 시장바닥에 섞여 있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아끼지는 않았다.”[서촌. 1, 역사 경관 도시조직의 변화(서울역사박물관 편, 2010) 중]


‘사대문의 중심인 종로에 이웃하면서도 시골 같은 동네’라는 말은 200년 전은 물론, 2012년 오늘날에도 여전히 서촌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셈이다.

서촌의 골목길도 200년 이상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최초의 근대 지도라는 한성부지도(漢城府地圖, 1902)는 물론, 18세기의 한성을 가장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도성대지도(都城E大地圖)에서도 오늘날 서촌의 골목길 형태를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길썰미만 있으면 조선시대 지도를 펼쳐놓고도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표시할 수 있고, 찾아갈 수 있는 동네라는 이야기다.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 ⓒ 문화재청


길이 변하지 않는데 집자리만 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집자리와 길자리를 모두 밀어버리는 재개발이 아닌 한에야 길이 그대로라면 그 길을 통해 닿았던 집자리의 모양도 크게 달라질 수 없음을 쉽게 짐작해 알 수 있다. 1910년에 시작된 일제의 조선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처음 만들어진 지적도를 보아도 지금의 지적도와의 차이점을 찾아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주로 관청이 소재하던 서촌에 본격적으로 주거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계급에 따라 주거지가 구분되면서 중인을 비롯한 이서계층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부터로 알려져 있다. 양반도 천민도 아니었지만 전문지식과 기능을 갖추고 있던 중인계급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계급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골목문학’이라는 뜻의 위항문학(혹은 여향문학)의 대표격인 시인 공동체 ‘옥계시사’도 서촌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단원 김홍도는 이들의 모임을 그림으로 그렸고, 추사 김정희는 이들 모임을 위해 ‘松石園’(송석원)이라는 글자를 써서 바위에 새겼다.

옛 모습을 이어가던 서촌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1930년대이다. 경제공황이 휩쓸고 간 후, 경기가 다소 회복되면서 경성으로 지방민들이 급격히 유입됨과 동시에 부동산 경기가 활황을 맞는다. 폭발하는 주택 수요에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던 집이 팔리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20평 내외의 땅에 10평 내외로 지어진 근대 도시형 한옥이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북촌, 서촌을 막론한 경성 전역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은 250년을 내다본다는 ‘대경성 도시계획’이라는 이름으로 경성이라는 도시 전체를 술렁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당시 개발 과정에서 큰 필지를 나누어 대량으로 공급됐던 한옥들은 지금도 곧게 뻗은 골목 양쪽으로 늘어선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1930년대의 대량주택공급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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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이완용과 윤덕영이 소유했던 거대한 땅과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집들이 비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전쟁으로 피난민이 유입되면서 서촌은 좀 더 비좁아진다. 경제개발시대에 상경한 지방민에 청계천 복개 공사로 집을 잃은 사람들까지 일부 서촌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판자집은 늘어나고 한옥집은 칸칸마다 한 가구씩 사는 집도 적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주거 환경이 열악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남파된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눈앞에 두고 진압되었던 청와대 습격사건은 서촌에 긴 인내와 고통의 시간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청와대에 인접한 동네라는 이유로 집을 고치려면 허락을 받아야 하고 지붕에라도 올라가면 경호원이 쫓아왔다는 주민들의 생활은 계엄령이나 긴급조치 처럼 얼마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개발의 엔진 소리가 드높을 때에도 서촌은 그로부터 비껴져 남겨지게 된 것은 분단의 현장이 천혜의 자연으로 돌아온 비무장지대를 연상시키게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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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촌은 가장 큰 변화를 겪게 된다. 1992년, 인왕산에 맞닿은 누상동이 노후불량주택 밀집지역이라는 이름을 달고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지정되고, 1994년에는 지금 서촌을 관통하고 있는 필운대로에 대한 계획이 추진되기 시작한다. 신교동에도 좁은 길 사이로 빌라가 들어선다. 당시에 빌라를 짓기 위해 주택을 허무는 과정에서 기와집이 헐리는 것은 물론 초가집들도 대거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달동네라는 이유로 인왕산과 맞닿은 동네를 중심으로 사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오히려 큰 도로에 가까운 체부동, 누하동, 통인동에는 기와집들이 많이 남게 된 것은 이러한 전후를 알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근래 들어 서울시의 한옥보존 정책과 맞물려 누하동, 체부동을 중심으로 한옥수선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주거환경개선’이 반드시 기존의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운 복층 건물을 지어야만 하는 것이었는지 생각해 볼 문제가 될 것이다.

커다란 변화를 여기에서 마무리하는 것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서촌의 골목에는 재개발을 외치는 고함소리가 드높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 때에 약속한 체부동, 필운동, 누하동, 옥인동 재개발과 오세훈 서울시장의 한옥보존정책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한옥보존을 조건으로 더이상 재개발이 진행될 수 없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아직도 열악한 주거환경과 한옥보존의 갈등은 잦아든 불씨로 남아있다. 옥인동 재개발의 경우, 아직 불씨가 꺼지지 않은 채 뜨거운 입김을 내뿜고 있다.

시내를 걸으며 고층 건물 발치에 조용히 놓여있는 표석을 읽는 것만으로 역사 속의 사건이나 장소를 상상할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다. 어느 누가 살던 집, 어느 누가 걷던 골목은 그러한 앙상한 기록에 생생한 숨을 불어넣을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이것은 비단 흔히 생각하는 거창한 ‘역사’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이 동네를 살았던 어느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풍경은 단순히 오래된 것으로써의 가치가 아니라 그 시간의 심연에서부터 지금까지 유구하게 켜를 쌓아온 퇴적의 산물이고 시간의 증거로써의 가치를 지닌다. 서촌은 그래서 재현될 수도 모사될 수도 없는 그 자체로 기원, 즉 오리지널이 되는 동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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