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1일, 수성동 계곡 복원 준공식이 열렸다. 취재 카메라는 곳곳에서 돌아가고 현장을 소개하는 기자들은 바윗돌 사이를 겅중거리며 뛰어다녔다. 준공식을 앞둔 계곡 입구에는 의자마다 사람들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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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동 계곡은 물 흐르는 소리가 좋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평대군의 비해당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어느 위치에 어떤 모습인지는 전혀 확인된 바 없다. 다만 겸재 정선이 당시 '장동'이라 불리던 서촌 일대의 풍경을 그린 장동팔경첩 중 일경이 기린교가 놓인 수성동 계곡을 배경으로 한 까닭에 그 옛모습을 되짚어볼 수 있을 뿐이다.
지금은 수성동계곡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처음 옥인아파트 철거계획이 나올 당시에는 수성동 계곡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서울 용강·옥인동 시범아파트 철거 (뉴시스, 2007년 12월 7일)
옥인아파트 철거가 결정된 것은 지금 '윤동주 시인의 언덕' 자리에 있던 청운아파트가 철거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서울시는 1997년에 '시민아파트 정리계획'을, 2002년에 '노후 시민아파트 정리 특별대책'을 수립하는데, 옥인아파트는 그 다음 순서로 추진된 오세훈 서울시장의 르네상스 사업 중 내사산르네상스의 일환으로 철거가 결정된 것이다. 이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청계천 복원에 이어 청계천 상류를 복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도 고려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재미있는 것은 보도에도 나와있듯 노후한 건물 탓에 철거됐던 청운아파트와는 달리 옥인아파트는 인왕산 녹지의 일부를 침범하고 있는 것이 철거의 주된 이유였다. 역시 어디에서도 수성동 계곡이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인왕산 도시자연공원 추진이 전환을 맞게 된 것은 기린교의 발견이었다. 철거 계획이 나온지 2년이 다 되어가던 가을에 갑자기 옥인 아파트 옆 계곡에서 조선시대 돌다리가 발견됐다는 보도가 나온 것이다.
조선시대 돌다리 발견 (연합뉴스, 2009년 9월 14일)
보도 사진에서 보다 시피 다리 위로 시멘트가 덮이고 양 옆으로는 철제 난간이 박혀진 채 40년 가까이 잊혀져 있던 기린교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다리는 겸재 정선의 수성동 계곡 그림에 그려진 모양과 위치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고, 다음 해에 수성동 계곡을 복원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 하지만, 기린교임을 명백히 확인시켜주는 사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현재에도 기린교의 공식 명칭은 '돌다리'에 머물고 있다.)
옥인아파트 40년만에 철거, 수성동 계곡 살린다 (매일경제, 2010년 9월 15일)
촛점은 인왕산 녹지를 침범하고 있는 옥인아파트가 아니라, 수성동 계곡을 가리고 있는 옥인아파트로 옮겨갔다. 이와 함께 서울시는 수성동 계곡과 돌다리를 서울시기념물로 지정하는데, 수성동 계곡은 서울시 기념물 중 최초의 자연물이라는 기록을 얻게 된다. 그렇게 공원 조성사업은 문화재 복원사업으로 방향을 틀게 되고 공원과 문화재라는 다소 낯설은 조합 안에서 크고 작은 혼란이 발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