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풍경으로 늘 마주치지만 기록하지 않으면 어느샌가 잊혀져버리고 마는 것들이 있습니다. 2013년의 '북촌의 봄'을 다시 보며 2016년의 '북촌의 봄'은 얼마나 달라져있을 지 생각해 봅니다. 




어느 여름날, 수성동계곡 인왕산 산책길 근처에서 산책하던 까치의 모습




청와대로 들어가는 길목인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 유족분들의 천막이 세워져 있던 때, 외국인 관광객들도 관광버스를 연무관 앞에 세우고 들머리 광장에서 사진을 찍는데, 세월호 유족분들은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천막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언제든지 만나겠다는 대통령의 약속은 그렇게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세월호 유족분들이 모두 안산으로 내려가시던 날, 잠시 지킬 이 없는 천막을 지키러 동네의 이웃분들과 함께 천막을 찾았습니다. 리본을 만들고 이야기 나누다가 천막 바깥에 붙어있던 현수막을 바라보았습니다. 자하문로 달리는 차들 곁에서 바람에 펄럭이는 현수막을 유심히 바라보며 지나는 분들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핸드폰을 꺼내들고 한 명 한 명을 영상으로 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모든 얼굴을 다 담고 나니 영상의 길이만 12분 51초가 되었습니다. 희생자의 숫자만으로는 쉽게 느껴지지 않은 아픔의 무게가 더욱 있는 그대로 다가옵니다.


지금도 많은 분들이 이 영상을 보고 아픔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이 곳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소개하며 잊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 꼭 밝혀내겠다는 약속 지키자는 다짐을 새롭게 합니다. 살아남은 우리에겐 그래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주말이면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는 길 중 하나가 삼청동길입니다. 새로 바뀐 도로명 주소에서는 '북촌로5가길'이지만 예전 도로명주소에서는 삼청동길의 일부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은 북적이는 삼청동길에는 20년 전만 해도 세모난 건물 1층 세탁소까지 네모난 보도블럭이 마름모 모양으로 깔린 좁은 인도가 이어져 있었습니다. 삼청동길이 겪은 20년 동안의 변화는 그야말로 세상이 뒤집어졌다 할 정도입니다. 20년도 되지 않은 어느 날 북촌 고개에서 내려오는 길에서 초가집을 마주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지금은 그런 풍경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늘 북적이는 삼청동길이 그나마 한가한 때는 월요일 아침이겠지요. 월요일 아침의 삼청동길 풍경을 영상으로 담아봤습니다. 시간이 다시 또 흐르고 나면 이 영상 속 풍경이 전혀 생경해지는 때가 또 올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변하든 적어도 쫓겨나는 슬픔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통인시장에서 수성동계곡을 잇는 옥인길을 걷다가 가슴이 철렁한 장면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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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9498 by Kim Hanwool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3층 바닥면에 있던 콘크리트가 녹슨 철근이 팽창하며 생긴 균열로 인해 공중에 매달려있다가 한꺼번에 떨어져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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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9500 by Kim Hanwool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건물 바로 앞에서 올려다 본 모습은 더욱 아찔하다. 건드리지 않아도 후두둑 떨어져 내린 콘크리트 덩어리들이니 아직 미처 떨어지지 못하고 옆에 불안하게 붙어있는 콘크리트 덩어리들은 또 언제 떨어질지 모를 일이다.


오가는 사람이 없는 때에 무너져 내려서 인명피해는 없는 것으로 보여 그나마 다행이었다. 더군다나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떨어진 바로 옆으로는 아이들이 오가는 출입구가 배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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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9502 by Kim Hanwool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노후건물이 많은데다 체계적인 노후건물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서촌의 특성 상 위태위태한 건물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한옥의 경우 큰 비가 쏟아질 때에 지붕이 주저앉는 경우는 최근 몇 년 간 해마다 두 세 건 씩 일어나곤 했을 정도다.


하지만 한옥에 비해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들은 노후건물 문제가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되지 않고 있는 듯 하다. 한국일보, SBS, tbs 등 언론에서 서촌의 노후건물을 취재할 때에도 늘 관심은 한옥에만 맞춰져 있었고 한옥 외의 건물이 언급된 경우는 예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니 일반의 관심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예에서 보듯 대부분 복층 구조를 가진 콘크리트 건물의 노후에 따른 문제는 단지 구조안전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는다. 건물관리를 꼼꼼히 하는 건물주가 드문 풍토에서 철근 부식으로 인한 콘크리트 박리나 외장재의 이탈 추락으로 인한 인명피해의 가능성은 서촌에서 만큼은 가능성 수준이 아닌 현실적인 위협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지난 겨울, 통인시장 동측 입구에 있는 효자아파트(통인아파트) 입구 5층 외벽에 붙어있던 대리석이 새벽4시 경 추락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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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5403 by Kim Hanwool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 사진은 대리석 외장재 한 장이 추락한 후에 건물 꼭대기를 두른 대리석을 모두 제거하고 콘크리트를 바른 모습. 하지만 다른 외장재들은 안전하게 붙어있는 것인지 확인조차 되지 않고 있어 아파트 거주민은 물론 시장 통행인의 보행안전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바닥에 깨져있는 두꺼운 대리석 조각이 5층 꼭대기에서 떨어져 산산조각났으니 한동안 돌 부스러기라도 또 떨어지지 않은까 노심초사하며 건물 입구를 드나들 수 밖에 없었지만, 잠시 길을 오가는 이들로서 이러한 문제를 알기도 어렵고 대책을 요구하고 방안을 마련하는 일은 더더욱 요원할 수 밖에 없다.


결국 건물 관리 책임을 가지고 있는 이가 책임의식으로 가지고 안전 문제를 신경쓰고 노후건물을 관리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있지 않고서는 어느 순간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콘크리트 덩어리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의 지원이나 대책이라는 것은 한옥지원금 지급이나 지난해 구청에서 효자아파트(통인아파트)에 도색비용을 지원한 것이 고작이다. 거주민의 주거안정과 주거안전을 먼저 살펴보고 그 후에 잘 정돈되고 꾸며진 외관을 챙기는 것이 순서일텐데, 안전 문제 보다는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에만 신경쓰는 듯 하여 씁쓸하기만 하다.


누하동 181번지에는 청전화숙과 함께 청전 이상범 화백의 집이 보존되어 있다. 청전 이상범 화백은 1928년, 조선일보에서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겨 삽화를 그렸는데, 1936년 손기정 옹의 마라톤 금메달 보도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경찰에 잡혀갔다가 풀려난 후 동아일보를 그만두게 된다.


청전 화백이 동아일보에 재직하던 때인 1935년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소설인 <흑두건(黑頭巾)>에도 청전의 삽화가 들어있는데, 그 중에 1935년 2월 9일자 220회 연재에서는 서울 지리, 그 중에서도 서촌에 대한 재미있는 내용이 있어 소개한다.


黑頭巾 <220> - 동아일보(1935.2.9.)

윤백남(尹白南) 작

이청전(李靑田) 화


강항은 동대문박 복차다리께서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야 야주현에 이르기까지에 수없이 술을 사서 먹엇다.

억병같이 취한강은 무슨 생각이 낫던지 야주현에서 위대로 가는 길로 드러섯다.

거기서부터 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어디를 어떠케 헤매고 돌아다니엇던지 그는 금충교 대리에 와서 씨러지고 말엇다.

인적이 끄닌 금충교 돌다리 위에서 그는 업드러진 그 자세대로 인사불성에 빠지고 말엇다.

...(중략)...

그러나 치위보다 더 그를 괴롭게한것은 갈ㅅ증이엇다.

목은 말러부터서 기침을 할 대 마닥 앞엇다. 그리고 입에는 침 한 점이 없어서 혀가 맘대로 돌지 안는다.

이 개천물이 만일에 훨씬 상류이엇더면 그는 의당 개천물이라도 손으로 훔켜서 목을 축엿을것이지마는 금충교 개천은 수채나 다름없는 더러운 물이라 아무리 갈ㅅ증이 심하다 하드라도 차마하니 그 물을 마실 수는 없었다.


인용된 부분에 나오는 지명을 살펴보자면, '복차다리'는 현재의 창신동으로 대략 동대문역과 동묘앞 역 사이 쯤이 되고, 야주현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뒷쪽 당주동 일대를 일컫는다고 한다.


강항이라는 주인공은 동대문에서부터 술을 이어마시며 걷다가 결국 야주현에서 위대로 들어가는 길에 들어선다. 위대는 '웃대'라고도 하는데, 소설에 표기된 것으로 보아 30년대 당시에는 '웃대' 보다는 '위대'라는 발음이 더 일반적이었던 듯 하다. 혹은 30년대 당시 조선시대의 지명을 고증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당주동에서 위대로 접어드는 길이라면 세종문화회관 뒤에서 종교교회 앞을 지나 경복궁역으로 향하는 북서방향의 길이 되는 셈인데, 결국 주인공은 지금의 경복궁역인 금천교 돌다리에 이르러 정신을 잃고 만다.


지금은 '금천교시장'이라는 이름이 가장 흔히 불리는 이름이고, 얼마 전부터는 고약하게도 종로구청에서 '세종마을음식문화의 거리'라는 생뚱맞은 이름을 붙여버리기도 했지만, 예전 신문기사를 찾다보면 '금충교'라고 부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금천교는 1928년에 일제가 길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헐려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흑두건이라는 소설의 배경이 금천교가 헐리기 한참 전인 조선 광해군 때인 탓인 듯 하다.


이 금천교 아래로 흐르는 물은 주인공 강항이 걸어왔던 길을 따라 세종문화회관 뒤를 지나 광화문네거리를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는데, 소설에도 나타나듯 지금의 수성동계곡이 있는 옥류동천 상류나 북악산에서 발원하는 백운동천 상류는 제법 맑은 물이 있어서 빨래터 등이 설치되어 있기도 했다.

참고로 흑두건은 30년대 이후 여러차례 단행본으로 출판된 바 있으며, 작자인 윤백남(1888~1954)은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으로 조선 최초의 희곡을 쓴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의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라고 하면 누구나 알겠지만, 최승희에 무용을 권하고 후에는 최승희의 자서전을 대필하여 출판한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최승일은 서울 출생으로 배재 출신으로 동경일본대학으로 유학을 다녀와 1922년에는 소설 〈상록수〉의 심훈과 함께 염군사(焰群社)에 가담하기도 했던 조선 예술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경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가 서촌과도 인연이 있는 것은 어찌보면 싱거운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또한 각별히 언급될 만 한 장소가 있는 탓에 무심히 지나칠 일도 아닌 듯 하여 자료를 찾아보았다.


동경일본대학 미학과에서 돌아 온 최승일(崔承一)은 대표적으로 북풍회(北風會), 경성청년회(京城靑年會),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프로예맹) 등에서 활동했으며, 그가 활동한 중에 '극문회(劇文會)'와 '라디오극연구회'는 지금의 서촌에 해당하는 사직동과 체부동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중 극문회는 경성으로 돌아온 최승일의 이름이 처음 나오는 계기가 되는데, 처음부터 연극 연구와 강연, 잡지발행 등을 통해 조선의 연극을 개량코자 조직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진취적인 활동을 펼쳐나갔을지, 짐작하게 되는 바가 있다.



劇文會創立 - 동아일보(1922.4.5)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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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동 187번지에서 극문회를 시작하고 2년 반 여가 지난 후인 1924년 12월 11일에는 프로(professional 아닌 prolétariat 의미) 작가와 미술가들 50여명 등이 함께 『경성청년(京城靑年)』을 창립하여 청년총동맹(靑年總同盟)에 가입하기로 결의한다. 여기에서 선출된 13인의 집행위원 명단에서도 최승일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京城靑年』發會 - 동아일보(1924.12.13)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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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경성청년회를 살펴보자면, 경성청년회는 사무실을 재동 84번지에 두었는데, 이 곳은 현재 현대 계동 사옥 서쪽 일대로 현재 84번지는 40여개의 필지로 쪼개어져 있다.


창립 총회 때에 집행위원에 위임한 강령과 사업안을 다음 해 3월 신문지상을 통해 발표한 바 있는데, 그 내용이 당시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있어, 현대어로 바꾸어 옮겨본다.


강령 및 사업안 보기



식민 경성에서 워낙 활발한 활동을 하던 최승일인 만큼, 여기서는 1926년 결성한 '라디오극연구회'만 다룬다. 최승일은 라디오극연구회를 통해 시험 방송을 주도하다가, 경성방송 개국 후에는 방송극을 연출하며 조선 최초의 방송 프로듀서가 되었다. 당연히도 이 때에 최승일이 연출한 방송극은 조선 최초의 방송극이다. 또한 그의 아내 마현경은 경성방송 첫 공채 아나운서로 그 전까지 진행을 맡던 이옥경 아나운서와 함께 조선 최초의 아나운서이기도 하다.


경성방송국 개국 전의 최승일이 이끌던 라디오극연구회의 주소는 체부동 137번지이다. 



라듸오劇硏究會創立 - 동아일보(1926.6.27)


기사는 '이달 그믐께'(1926년 7월 초순)에 체부동 137번지에서 최승희 원작 이경손 각색의 단막극 <파멸(破滅)>을 공개 시험할 예정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1925년 6월 무렵부터 시험방송을 했다고는 하지만, 아나운서가 없어 기술국 직원이 번갈아 아나운서 역할을 해오다가 1927년 2월 16일에야 경성방송국의 첫 전파가 송출되었다고 하니, 어쩌면 이 때 공개 시험으로 진행 된 <파멸>은 조선 최초의 라디오극으로 쓰여진 작품이지 않았을까. 경성방송국은 조선중앙방송국과 한국방송(KBS)의 전신이다.

서촌에 한 번 쯤 와봤다면 들르는 체부동의 토속촌삼계탕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다녀간 집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후로 손님의 매해 늘어 이제는 일곱 채의 한옥을 식당으로 쓰고 주변의 빌라를 조리실 및 숙소 용도로 매입하는데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주차장도 부족하여 골목 건너편의 집들을 매입해서 지난 1년 사이에 가옥을 모두 철거하고 주차장으로 만들었는데 체부동 137번지 가옥이 이 때에 헐려나가고 말았다. [ 다음로드뷰로 보기 ]


최승일의 극문회가 자리잡은 사직동 187번지도 언제 사라졌는지 현재는 광화문풍림스페이스본 106동 서쪽 골목 어귀에 187-1이라는 지번만 남아있다. [ 다음로드뷰로 보기 ]


마지막에서 밝히자면 이 포스팅은 70년대 초중반에 걸쳐 체부동 138번지에 거주하셨던 분의 말씀을 따라 혹시나 관련한 역사가 있는지 찾아보던 중, 체부동 137번지에 대한 kurtnam 님의 포스팅 [ 기록에 관한 기록 ]을 찾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삼계탕집 주차장 부지에서 드러나는 철거된 역사에 대한 아쉬움은 역사의 기록과 그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그 망각에 대한 형벌이란 이처럼 무섭도록 정직하게 내려지고 만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현재 경복궁역 사거리에서 '자하문터널'로 이어져 세검정로에 닿는 길을 '자하문로'라고 하고, 궁정동에서 북악산 허리를 타고 올라 창의문(자하문)과 '윤동주 시인의 언덕' 사이로 백악과 인왕을 잇는 능선을 넘어 부암동 주민센터로 닿는 길을 '창의문로'라고 합니다.


하지만 자하문로는 '자하문길'로 불린 시간도 만만치 않습니다. 1986년에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길 이름을 '자하문길'로 명명하기도 했지만, 언론 보도에서는 1984년부터 '자하문길'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기도 하니까요.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이 길의 이름을 '자하문길'로 명명한 것은 공사 완공을 한달여 앞둔 86년 7월 말이었습니다. 



청운동~세검정路 「자하문길」로 名命 - 경향신문(1986.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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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마무리 공사중인 청운동~세검정간 도로(너비 25~29m, 길이 1,590m) 이름을 「자하문길」로 의결하였다는 기사입니다. 1984년 신문보도로 공사계획이 보도될 때에는 '청운쌍굴'로도 표기됐던 자하문터널도 이 때에 함께 지금의 이름을 얻습니다. 



清雲(청운)·平倉(평창)동일대 아파트·빌라團地(단지)로 단장 - 경향신문(1984.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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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는 기존 도로의 확장과 직선화, 터널 개통, 주택조성으로 진행됐습니다. 지면에 게재된 계발계획도 중 자하문로와 관련된 부분만 살펴보면 현재의 자하문터널 남쪽 입구에서부터 610m 길이의 도로를 신설, 확장하는 사업으로 진행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간의 길이를 현재의 지도에 적용해보면, 지금의 터널 남측 입구에서부터 경기상고 정문 앞까지가 신설구간, 경기상고 정문 앞부터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까지가 확장구간에 해당함을 알 수 있습니다.




지도에 표시된 구간 아래로 지금의 경복궁역 사거리로 이어지는 길은 '추사로', '궁정로' 등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 길은 정부 발표를 인용한 언론 보도에서는 통상 '적선동107~궁정동13'(혹은 '적선동107~청운동108') 구간으로 표기되었습니다.



內資洞~청운國校 도로 1.6km 확장 준공
- 동아일보(1978.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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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한 가운데 넓게 펼쳐진 자하문로의 모습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착공이 같은 해 6월이니 폭 40m의 도로로 확장하기 위해 사유지 306필지(6,335평)를 수용하고 건물 141동(5,918평)을 철거하는데에 불과 반년 밖에 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문은 1990년 8월 철거된 내자호텔부터 청운국교 사이의 1.6km도로라고 적고 있는데, 이 때문에 자료를 검색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같은 길을 두고 기사 마다 '적선동107~궁정동13'이나 '내자동~청운국교' 등으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으니, 자하문로에 관한 내용을 찾으려면 우선 길을 일컬을 때 쓸 수 있는 모든 단어를 꼽아봐야 하는데다, 단어의 조합이 많아지는 만큼 정확한 정보를 찾아내기까지의 검색 시간도 길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한 번 정해놓고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 역사를 복기하고 시간을 되살리는 데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시 한 번 환기하게 됩니다. 


자하문길은 아마도 김대중 정권 당시 길이름을 종횡에 따라 구분하면서 지금의 이름인 '자하문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누하동 오거리에서 체부동 골목으로 접어들면 라파엘의 집 뒤편을 지나 길이 굽으며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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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부동 107번지 건물 전면 / _IMG_0422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잠시 멈춰 가만히 살펴보면 처음부터 사람이 살기 위해 지어진 집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다른 사연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열린 문 안쪽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면 햇볕도 잘 들지 않는 좁다란 복도를 따라 다닥다닥 방문이 줄지어 있는 풍경이 나타납니다.


쓰레기 배출에 대한 주의문구가 붙어있는 것을 보면 여러 사람이 살고 있는 다가구 주택임을 알 수 있지만, 문 간격으로 봐서는 쪽방촌을 연상케 합니다.


이런 건물은 흔하지는 않지만 잘 살펴보고 다니면 또 의외로 눈에 띠는 종류의 건물인데, 짐작에는 공장이거나 공원(工員)들을 위한 숙소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몇 걸음 물러서서 보면 앞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게 제법 길쭉하게 자리잡고 있는 건물임을 알 수 있는데요. 짐작에 힘이 실리는 대목이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처음부터 사람이 거주 할 목적으로 지은 건물이 이렇게 길쭉한 형태에 실내는 어두침침하게 지어지지는 않으니까요. 게다가 밖으로 나있는 창도 그리 친철해보이지는 않습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동네의 곳곳을 안내하고 설명하기도 했지만, 이 건물에 대한 궁금증은 좀처럼 해결 할 기회를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발견한 옛 신문 기사가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네요.



都心(鍾路·中區)공장 모두 移轉 - 경향신문(1978.3.23.)
PDF 지면 보기 ]



서울시는 1978년 3월 23일, 종로구와 중구 등 도심지역의 공장을 1980년까지 모두 변두리나 지방으로 이전하는 방침을 확정하여 발표했습니다. 이 때에 이전 명령을 받은 업소 중에는 '태화두부 공장'과 '태성두부'라는 곳이 있는데 체부동 107번지와 통의동 118번지에 각각 소재했다고 합니다.


서울시에서는 도심 인구 과밀 해소를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기사에서 지적하고 있다시피 영세한 공장들을 지방으로 옮기면 직원들의 통근만 불편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직원 통근 문제 뿐만 아니라, 생산과 소비가 인접할수록 편리한 생필품의 경우에는 '직주근접(職住近接)의 원칙'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에 비추어도 당시 서울시가 밝힌 공장 이전의 이유가 쉽게 납득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이 건물을 보면 공장이 이전되고 나서 직원들은 멀리 떠났을 지는 몰라도 작은 방들이 줄지어 들어서 오히려 도심 인구는 늘어나는 셈이 된 듯 합니다.


'태화두부 공장'과 달리 '태성두부'가 자리하던 통의동 118번지는 포털 지도서비스에서 지번이 나타나지 않는데, 인근 번지를 보아서는 옛 '커피즐겨찾기' 근처로 1978년 6월 자하문로 확장 공사가 착공되면서 철거되고 지금은 길 위에 어디 쯤으로 남게 된 듯 합니다.


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도 골목 어귀에는 두부공장이 있었는데, 뚝딱거리던 소리와 펄펄나던 김이 무척이나 활력있어 보였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때 그 두부공장도 체부동 107번지 건물과 닮았던 듯 하네요.


혹시 지금도 주거지 가운데에 남아서 두부를 만들고 있는 두부공장이 있을까요? 동네 슈퍼를 가더라도 브랜드 로고가 선명한 두부들 사이에 고군분투하는 전국구 두부 브랜드들 밖에 볼 수 없는 지금에, 동네 두부공장과 저녁시간이면 딸랑대던 두부 아저씨 생각이 다시 납니다.



지도를 클릭하시면 위치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 737 2013.01.05 21:27

    어 ㅎ 믿으실지 모르지만 이 두부공장 운영하시던 분의 손자입니다 두부 생산안한지 엄청 오래됐구요 ㅎ 저도 간혹 종로 볼일있을땨 시간나면 가보는데 인터넷에서 보니 정말 반갑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김 한울 2013.01.31 23:48 신고

      앗, 이렇게 댓글이 달릴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동네 미시사(micro-history)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 저것 찾아보고 있습니다. 손자분이시라면 동네에 대한 다른 기억 혹시 가지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서울성곽,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오늘로부터 정확히 3년 전인 2009년 9월 4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유네스코의 자문기관인 이코모스(ICOMOS,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관계자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모인 가운데 국제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서울성곽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겠다는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의 의지를 천명한 가운데 열린 심포지엄이었다.


그 후, 오세훈 서울시장이 사임하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취임하였지만 서울성곽 복원 및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만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 1월 31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성곽 순성을 하며 현장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시민이 최우선임을 강조하며 형식적인 복원은 없을 것이라 한 것 정도가 변화라면 변화였다고 할 수 있다.


박원순, "형식적인 서울 성곽복원 없다" - 서울문화투데이 (2012.1.31.)


성곽 구간에 따라서는 기존의 험준한 바위지형을 성벽 삼아 인공적인 성곽 축조를 생략한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재의 성곽 복원은 기존의 구간과 형태에 대한 고증이 얼마나 정확히 된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왕산 정상부까지 복원이 완료되는 등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다.


서울성곽 복원의 현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하지만 서촌에서의 일상에서 바라보게 되는 풍경 중에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추진되고 있는 서울성곽 복원이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도 있다. 서울성곽 복원이 그저 고개를 끄덕일 일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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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능선 너머로 북한산이 보이는 자하문로 풍경 / _IMG_3289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태풍이 지나가고 비교적 청명하던 날씨에 북악산 서쪽 능선으로 구름 그림자가 져있다. 자세히 보면 북악산 녹지선이 수평에 가깝게 자연스럽게 이어지다가 화면 가운데에서 갑자기 움푹 패여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누런 흙과 파란색 유실방지 덮개가 도드라지는 곳이 현재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현장이다.


북악산은 14세기 말 조선이 건국된 후, 한양이 새로운 도읍으로 정해지는 과정에서 풍수지리 상 주산이 된 산이다. 바로 이 북악산을 중심으로 동쪽의 좌청룡이 대학로 뒷편의 낙산이고, 서쪽의 우백호가 서촌을 감싸고 있는 인왕산이며, 주산을 마주한 목멱산이 남산이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북악산은 백악산이라는 옛 이름으로 명승 67호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위의 사진을 부분 확대한 사진이다. 사진 가운데로 펜스가 쳐진 가운데 흙이 파헤쳐진 모습이 보인다. 궁정동에서 창의문로를 따라 자하문으로 올라가는 길의 오른편에 위치한 문제의 공사현장이다. 빌딩 창문 밖으로 북악산이 보이는 정동의 빌딩 창가에서도 눈엣가시처럼 시야를 괴롭히는 이 현자은 다름아닌 군부대 막사 신축 공사 현장이다. 언론 보도를 잠시 살펴보자.


환경단체 “북악산 군 막사, 명산·유산 훼손” - 경향신문 (2012.02.09.)



복원의 가면을 쓴 개발의 그림자

북악산에 군 막사를 신축하는 것과 서울성곽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의 관련은 보도에도 나와있다시피 막사 신축에 대한 수도방위사령부 측의 설명에서 발견된다. 옛 막사가 성곽과 가까운 까닭에 최대한 먼 곳에 신축하고 있는 것이라는 설명이 그것이다.


서울 성곽을 복원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다는 것은 600년 도읍인 서울의 역사를 알리고 자부심을 갖자는 뜻으로 읽힌다. 하지만, 그 성곽이 둘러싸고 있는 정작 중요한 도읍 자체의 경관은 성곽 복원 사업으로 인해 훼손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이 공사현장은 서울환경운동연합과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등 여러 전문성 있는 시민단체의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꾸준히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서울성곽의 '복원'이 또다른 얼굴의 '개발'로 다가오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증거인 셈이다.


복원을 하더라도 개발을 수반할 수 밖에 없는 개발주도형 복원이 우리 사회의 한계인 것일까. 매일같이 올려다보게 되는 북악산 군 막사 신축 현장을 보며 되새기게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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