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경복궁 서측 지구단위계획구역 개발행위허가제한(안)'을 가결시키면서 기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는 골자는 아래와 같습니다.


● 한옥지정구역 건폐율 60% → 70%

● 건축물 높이 16m 이하로 제한

● 비주거용도 건축물 신.증축 금지

● 주택을 음식점으로 바꾸는 용도변경 금지(젠트리피케이션 억제)


용도변경 금지는 젠트리피케이션 억제 보다는 상업화 억제라고 하는 편이 타당합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주거지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죠. 구체적으로 세세한 결정 사항을 따져 볼 일이긴 하지만 언론에 보도된 내용으로는 환영할 만 한 일입니다.


저는 지난 수개월 동안 이 안을 만드는 데에 기여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서울시청 쪽에서 자문의뢰를 받아 안을 검토하는 협의회의에 수차례 참석하며 적극적으로 개진한 의견이 상당수 받아들여진 점에서는 무척 기쁜 마음입니다. 이 대책으로 더 이상 폐지줍는 노인분들을 비롯한 생계가 어려운 분들이 오래 정붙이고 살아온 동네를 떠나는 일이 조금이나마 줄어들기를 바랄 따릅입니다.


급격한 젠트리피케이션을 억제하고 도심 주거 공동화를 막기 위해서는 주거 공간의 공급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존의 주거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하면서 꾸준히 줄어들고 있는 인구를 만회하기 위해 새로 유입되는 주거를 받아들일 수 있는 거주공간 확대 방안을 함께 관철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점과 대책의 맥락은 사실 종로 전지역에 일괄 적용이 시급하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다만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서촌 지역에 특화된 것들이기에 각 지역에 따라 상당부분 조정이 되어야 하겠지만, 상업화에 토박이들이 밀려나는 일을 방지하고 거주 인구가 늘어날 수 있도록 지가상승을 억제하거나 상쇄할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종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대동소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서촌의 매동초등학교는 물론이고 북촌 일대의 재동초등학교와 교동초등학교도 학생수 감소로 폐교 혹은 통폐합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 여러 해 전입니다. 단순히 인구가 감소하니 그에 맞춰 공공 인프라를 줄여야 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인구가 감소하는 원인을 찾고 그에 맞춰 인구 유지 혹은 확대의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 것이 종로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의 (동문이기도 한) 학부모님들이 폐교 혹은 통폐합을 막기 위해 애쓰고 계십니다. 이들 학교는 설립년도가 각각 1894년(교동초), 1895년(매동초, 재동초)입니다. 지금까지 역사유산은 늘 박제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들 학교는 지금도 여전히 학생들이 매일 등하교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역사유산인 셈입니다.


살아있는 역사유산인 종로가 그 역사를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도록 종로 전역에 '제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지원'하는 대책까지 잘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 해당 기사

[한겨레]서울 서촌 한옥마을 상업화 일단 제동 - 2015.2.5.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67697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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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1255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서촌은 한성 도읍의 서쪽 동네라는 뜻으로, 인왕산 아래에 있는 동네를 부르는 말입니다. 동이름으로 꼽자면 가장 유명한 효자동부터, 청운동, 궁정동, 창성동, 신교동, 옥인동, 통인동, 누상동, 누하동, 체부동, 통의동, 필운동, 사직동, 내자동, 적선동까지. 서울 도시철도 3호선 경복궁역에 가까운 동네라고 하는 것이 가장 알기 쉬운 설명이 될 것입니다. 요즘에는 북촌 한옥마을이 유명해진 덕분에 경복궁 동쪽이 북촌이고 서쪽이 서촌이라고 쉽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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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이라는 이름이 언제 처음 붙여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에 동서분당으로 ‘동인’과 ‘서인’이라는 이름이 생겨날 때에 서촌에 사는 사람이 많은 쪽을 서인이라 이름 붙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적어도 수백년은 된 이름일 것입니다. 조선의 가장 대표적인 활터 다섯 군데인 서촌오사정(西村五射亭)이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 필운동, 삼청동에 걸쳐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 우리가 ‘서촌’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부르기 시작하는 동네가 조선시대에 부르던 범위와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름만 오래된 것이 아닙니다. 조선시대 한성 지도를 펼쳐보실 기회가 있다면 지금의 서촌 일대 지도와 함께 번갈아 보며 비교해보세요. 20년 전에 새로 난 길을 빼고 보면, 조선시대 지도의 길이 지금도 그대로 골목으로 남아있는 곳이 서촌입니다. 골목 바닥에는 블럭이 깔리고 담장은 개량 한옥의 붉은 벽돌이나 일식가옥, 때로는 빌라로 바뀌었어도, 조선시대 서촌 사람들이 걷던 길 모양 만큼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골목길 만이 아닙니다. 경복궁역에서 자하문터널까지 이어지는 큰 길은 ‘백운동천’이 흐르던 물길 따라 길을 낸 탓에 폭이 일정하게 직선으로 뻗은 도로가 아니라 좁았다 넓어지곤 하는 구불구불한 8차선 도로가 되었습니다. 인왕산에서 뻗어 내려온 능선과 골짜기를 경계삼아 작은 동네가 갈리는 이유로, 앞서 꼽아본 것 처럼 서촌에는 법정동만 열다섯 개에 이릅니다. 골짜기 따라 사람들이 다니던 자취가 골목이 되었고, 골목 끝에 닿았던 스무평 남짓한 자그마한 집자리들이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함 없이 그대로입니다. 모양 뿐 아니라, 굽이굽이 걷다보면 골목 모퉁이 너머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도, 골목 어귀마다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것도 예전 그대로 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각종 전문기술을 가지고 있던 중인 계급의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옥인동 재개발구역으로 더 많이 알려진 송석원 일대는 조선의 중인문학으로서 ‘골목문학’이라는 뜻의 위항문학(혹은 여향문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 곁으로는 겸재 정선이 살던 인곡정사가 있었고, 겸재는 지금의 마을버스 종점에 있는 수성동 계곡과 송석원이 있던 옥류동을 그렸습니다.

이런 것을 동네의 내력이라고 하는 것인지, 시인 이상이 태어나서 성장했고 시인 윤동주가 소설가 김송의 집을 찾아 하숙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청전 이상범, 박노수, 노천명, 이중섭, 구본웅, 천경자, 김동진 등 길을 걸으며 꼽게 되는 예술가의 이름만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온전히 품고 간직해온 동네의 비결은 안타깝게도 밝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못됩니다. 군사독재 시절 내내 청와대에 가장 가까운 동네라는 이유로 아궁이라도 고치려면 신고를 해야 했고, 옥상에 빨래라도 널러 올라가면 경호원이 쫓아왔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집니다. 수십년 동안 불편을 감수하고 견뎌온 시간이 결국 다른 동네의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밑거름이 된 셈입니다.

이런 서촌에 처음으로 찾아온 개발의 파도는 골목과 집들 가운데로 아스팔트 길을 내고 주거환경정비구역 지정으로 초가집과 기와집이 헐린 자리에 빌라가 들어서던 1990년대입니다. 산업화 시대에 서울로 밀려들던 인구에 더해 청계천 복개로 쫓겨온 사람들까지 들어오면서 초가집 칸칸이 한지붕 여러가족으로 사는 집이 흔했을 정도로 열악했던 주거환경을 생각하면, 개발이라고 해서 마냥 눈살 찌푸릴 일 만은 아닌 듯도 하지만, 동네가 옛모습을 가장 많이 잃어버린 때가 이 때였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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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1513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그 다음 파도는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왔습니다. 아직도 구역지정이 해제되지 않고 있는 옥인동, 누하동, 필운동, 체부동에 아파트가 들어선 조감도가 동네 곳곳에 붙고, 건설사의 명절 인사 현수막이 내걸리던 때가 불과 몇 년 전입니다. 재개발을 앞두고 어차피 헐릴 집이라는 이유로 수리를 미루던 집들은 그 몇 년 사이에 부쩍 낡아버린 탓에, 여름에 폭우가 지나간 동네엔 무너진 집을 세고,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집 안에 텐트를 치는 집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서울시의 한옥보존 정책으로 그나마 근래에는 집 고쳐짓는 소리가 잦아지고 있긴 하지만, 이미 낡아버린 집과 아직 재개발이 포기되지 않은 채 갈등을 겪고 있는 옥인동 재개발 구역은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이제 새로이 덮쳐오고 있는 새로운 파도는 상업화와 관 주도의 테마파크화입니다. 삼청동과 북촌은 이미 ‘삼청동화’, ‘북촌화’라는 말이 통할 정도로 동네사람 누구나 걱정하는 나쁜 선례가 됐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삶은 아랑곳 없이 오래된 골목과 옛 향수를 자극하는 동네의 모습만을 구경하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만을 위해 문을 연 상업시설들은 동네를 지켜온 주민들에게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가게가 늘어나면서 부동산 시세가 들썩이면 결국 주민들은 쫓겨나야 하는 운명에 놓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똑같이 동네를 보러 오더라도 동네 사람들이 운영하는 가게를 더 많이 이용하고, 동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더 나은 동네를 위한 고민을 함께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됩니다.

여기에 더해, 관에서는 북촌 한옥마을 조성을 본따 동네 곳곳에 가득한 유명인들의 자취를 기념관으로 되살리고 격식 높은 기와지붕으로 동네를 테마파크화하려는 계획을 하나씩 실행에 옮기고 있습니다. 동네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예술가들의 이름을 이용해서 동네 사람들이 삶을 일구던 공간에 사람이 살지 않는 기념관과 전시관을 조성하려는 계획은 동네에 살고 있는 입장에서 그다지 반길 만 한 소식으로 들리지는 않습니다.

서촌은 낡은 동네이지만 또한 시간을 품고 있는 동네이기도 합니다. 삶을 부정하고 개발이익을 쫓는 광풍에서 비껴있던 개발의 비무장지대 같은 동네였습니다. 하지만 집을 헐고 땅을 깎아 아파트를 지어올리는 재개발이 서촌의 일부에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고, 다른 곳에서는 동네를 지켜온 삶의 자리를 뒤흔드는 또다른 얼굴을 한 재개발도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서촌은 우리가 개발의 시대를 지나오며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질문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도시의 모습인가에 대한 질문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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