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기억
내가 가진 가장 오래된 기억들이 붙박은 공간은 마당 계단과 부엌에 작은 타일이 박혀있던 개량한옥이다. 그 집 안에서도 안방 아랫목이다. 부뚜막 연탄불 열기가 올라오는 안방 아랫목 위에는 부엌 너머 건넌방 위까지 이어지는, 낮은 천장의 다락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늘 오가며 익숙했던 그 마당도 그 곳에서 내려다 볼 때 만큼은 전혀 다른 공간인 것 처럼 신선했다.
다락
어른들은 허리까지 숙여가며 간신히 드나들던 곳이어서 아직 학교에 다닐 나이도 되지 않았던 내게는 나에게만 편한 유일한 공간으로 생각되어 유달리 애착이 갔지만, 잡다한 짐들을 쌓아두고 창고 처럼 쓰던 곳이라 혹여 호기심에 쌓인 물건들을 들추다가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어른들은 다락에 올라가는 것을 그다지 달가와 하지는 않았다.
건넌방
다락 아래에는 주로 세를 놓던 작은 방이 있었는데, 마당에서 통하는 문과 함께 부엌으로 바로 통하는 문도 가지고 있었던 방이다. 셋방이라 자주 가보지는 못했지만, 마당에서 계단을 올라 들어가던 방이 마당에서 문턱 넘어 계단을 내려가야했던 부엌과 이어지느라 부엌에서 그 방까지는 낙차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 낙차는 미취학아동의 눈으로 봤을 때의 것이니, 지금 다시 보게 된다면 그다지 높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연탄광
그 작은 방 뒤로는 연탄광이 있었는데, 부엌으로만 통했다. 집에서 가장 어둡고 서늘한 곳이었다. 겨울이 되기 전에 대문에서 마당을 지나 부엌으로 들어와 연탄광까지 연탄가루 받치는 깔개를 깔아놓고 연탄을 들이던 장면도 어렴풋 하지만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안방 뒷마루
부엌에서 더 깊숙히 들어오면 안방 뒤로 좁게 난 마루로 올라오는 계단이 있었고, 밥상은 그 곳을 통해 안방에 들여졌다. 겨울에 부엌에서 식혜가 끓고 있노라면 안방 뒷문을 열고 부엌으로 고개를 내밀어 식혜 거품을 떠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식혜가 다 되기를 기다리곤 했다. 다된 식혜가 들통 째 계단 위에 놓이면, 그대로 살얼음이 얼어서 안방 뒷문을 열고 차가운 식혜를 떠다가 냉큼 아랫목으로 돌아갔더랬다. 안방 뒷마루에는 다디미돌 하나와 다디미 방망이 한 쌍이 있었는데, 쓰는 것을 본 적은 없었고, 한 때 썼지만 지금은 쓰지 않는다는 얘기만 들었던 것 같다.
안방
안방은 부엌과 닿은 아랫목 쪽으로 마당으로 통하는 창이 있었다. 그 창을 열어놓으면 툇마루와 마당은 물론 대문까지 내다보였다. 지금 생각컨대, 아랫목에 앉아 마당을 둘러싼 집 곳곳은 물론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까지 한 눈에 다 볼 수 있는 재밌는 창이었다.
밤이면 아랫목 쪽으로 머리를 동으로 둔 채 이불이 깔렸고 서쪽 벽에는 시계와 TV, 전화기, 달력 등이 놓이고 걸리며 안방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북쪽 벽에는 벽 전체를 채우는 검은 자개장이 이불장과 옷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대청
안방에서 가장 큰 문은 네짝으로 되어 대청으로 통하던 문이었다. 대청에서는 서까래가 보였던 것 같은데, 그 높고 어두워 까마득한 천장은 어린 내게 그다지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는지 별다른 기억이 없다. 다만 대청에서 마당으로 통하는 가운데에 어두운 섀시 문이 있었던 것 같고, 한 가운데 둥근 기둥이 놓여 그 너머로는 툇마루로 이어져 있었다. 신발을 벗지 않고 들르는 손님에 간단한 상을 낼 때는 그 툇마루로 내었던 기억이 있다.
건넌방
대청건너에도 방이 하나 있었다. 집 안에서 안방에 이어 두 번 째로 큰 방이었는데, 역시나 안방에 이어 두 번 째로 자주 드나들던 방이었다. 안방과 마찬가지로 대청과 통하는 네짝 문이 있었지만, 그 문은 대부분 쓰이지 않고 마당으로 통하는 문을 통할 때가 더 많았던 듯 하다.
마당
부엌 건넌방과 부엌, 안방, 대청, 대청 건넌방이 둘러싸고 있던 마당은 두 계단 쯤 아래로 옴폭했다. 마당 너머로는 붉은 벽돌의 복층 집 북벽이 보였고, 그 벽에 기대어 1m 안되는 폭의 화단이 석축 위로 잇었는데, 한 가운데에 2층 높이의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하루는 그 큰 나무를 밤중에 내다봤는데, 나무가 거대한 쥐로 둔갑해 있어서 몹시 놀라며 무서워 했더랬는데, 잠을 깨고 어른들께 꿈 얘기를 해줬더니 악몽이라고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악몽'이라는 말을 처음 배우던 순간이었던 셈이다.
마당 가운데 안채에서 먼 쪽으로 수도가 있었다. 그 수도를 틀고 마당 청소를 하면 물기 머금은 돌냄새, 시멘트 냄새가 피어오르곤 했다. 수돗가 쪽으로는 문간방과 화장실이 있었는데, 이 이 문간방은 주로 젊은 부부가 세를 들어 살았던 것 같다.
문간방
하루는 이 문간방에 사는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기가 화장실에 빠져서 건져내지기도 했다. 똥독을 걱정하던 어른과 괜찮다던 아기 엄마의 대화가 어렴풋 한데, 내가 집 밖에 있을 때 일어난 일이라 직접 보지는 못하고 나중에 얘기만 들었다. 그 날 부터 어른들은 화장실 갈 때 마다 바닥을 조심하라고 주의 주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변소
변소는 마당에서 다시 한 두 계단 쯤 올라가서 열리는 가장 구석자리 좁은 문을 두고 있었는데, 문을 열면 타일 박힌 바닥이 다시 한 계단 올라가 있고, 조명은 백열등이 달려있었던 것 같다. 따로 변기가 갖춰져 있지는 않았고, 바지를 내리고 마당을 향해 앉기 전에 아래를 내려다 보면 분뇨와 휴지가 저 아래 고여있는 것이 보이는 구조였다. 똥차가 오면 골목 쪽 문을 열고 굵은 호스를 대고 분뇨를 퍼내곤 했는데, 말끔히 퍼내고 나면 구멍 아래 바닥이 저 아래로 깊게 보여서 더 무서워 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문간방
문간방에서 화장실 반대편으로 대문이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이 대문 왼편, 대문에서 들어설 때는 오른편에 가장 작은 방이 하나 있었다. 이 방도 역시 세를 놓았는데 주로 혼자 사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골목 쪽으로 높이 쪽창이 하나 있었고 좁은 방이나마 좁은 툇마루가 있었던 것 같은데, 툇마루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대문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방이라 볕이 가장 어두웠다. 마당에서도 깊숙히 들어와 있고 골목 쪽으로는 쪽창이니 볕 들 구멍이 그다지 없었으리라.
골목
대문을 나서서 오른편을 보면 아래로 잠시 완만한 경사가 지며 전봇대가 하나 보였다. 완만한 경사가 끝나면서 골목이 살짝 왼쪽으로 어긋나 이어졌는데, 그 경사 때문에 화장실 자리 아래쪽으로는 석축 같은 것이 집을 받치고 있었던 것 같다. 거기에 밖에서 분뇨를 퍼내던 문이 있었다.
골목은 공을 차고 놀기 적당했고, 완만한 경사를 가진 골목을 따라 내려가면 어귀에 작은 복덕방이 하나 있었다. 어린 나에게는 그 아래부터는 동네였고, 그 위로는 골목이었다. 복덕방 반대편으로는 두부공장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고, 두부공장 왼쪽으로는 골목 뒤편으로 이어지는 길이 하나 나 있었다. 두부공장과 복덕방은 좀 더 큰 길을 기준으로 같은 편에 서 있었는데, 그 길 건너편은 작은 가게들이 이어져 있었다. 삼거리 같은 사거리였던 셈이다. 시장 쪽으로 좀 더 가면 오락실이 하나 있었고, 장난감을 파는 문구점도 하나 있었다.
다시 찾은 골목
그 집, 그 골목에서 남겨진 마지막 기억은 80년대 후반 쯤의 것이다. 다시 그 골목을 찾았을 때는 95년 여름 쯤이었다. 골목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관문에서처럼 내 몸이 커진 만큼 작아져 있었고, 살던 집은 물론 그 주변도 모두 사라져 정확히 어느 신축 건물이 내가 살던 터에 세워진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아마도 원룸 건물이 들어선 곳이 내가 살던 집의 터인 듯 했다.
사라진 동네
그로부터 다시 15년이 지났으니 10년이 채 안되고 다시 찾아간 95년 보다 또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 골목 풍경까지 사진으로 보여주는 지도 서비스 덕분에 다시 찾아 본 내가 살던 골목은 이제 꺾어지던 골목도 곧게 펴지고, 좌우로 즐비하던 개량한옥들도 모두 헐렸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다가구, 다세대 주택은 어느 것 하나 예전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없다. 정원이 딸린 양옥집이던 골목 맞은 편 친구 집도 마당 없는 다가구 주택이 되었다. 마치 그 골목과 그 집에서 보냈던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모두 조작된 것 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고향을 잃는 다는 것은 아마 이런 의미일 것이다. 살던 집의 번지수를 외우기에도 너무 어린 나이였던 내가 지금 그 곳에 다시 섰을 때 그 장소를 추억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어주는 것은 단 하나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 남은 하나는 다름 아닌 전봇대였다.
내가 가진 가장 오래된 기억들이 붙박은 공간은 마당 계단과 부엌에 작은 타일이 박혀있던 개량한옥이다. 그 집 안에서도 안방 아랫목이다. 부뚜막 연탄불 열기가 올라오는 안방 아랫목 위에는 부엌 너머 건넌방 위까지 이어지는, 낮은 천장의 다락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늘 오가며 익숙했던 그 마당도 그 곳에서 내려다 볼 때 만큼은 전혀 다른 공간인 것 처럼 신선했다.
다락
어른들은 허리까지 숙여가며 간신히 드나들던 곳이어서 아직 학교에 다닐 나이도 되지 않았던 내게는 나에게만 편한 유일한 공간으로 생각되어 유달리 애착이 갔지만, 잡다한 짐들을 쌓아두고 창고 처럼 쓰던 곳이라 혹여 호기심에 쌓인 물건들을 들추다가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어른들은 다락에 올라가는 것을 그다지 달가와 하지는 않았다.
건넌방
다락 아래에는 주로 세를 놓던 작은 방이 있었는데, 마당에서 통하는 문과 함께 부엌으로 바로 통하는 문도 가지고 있었던 방이다. 셋방이라 자주 가보지는 못했지만, 마당에서 계단을 올라 들어가던 방이 마당에서 문턱 넘어 계단을 내려가야했던 부엌과 이어지느라 부엌에서 그 방까지는 낙차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 낙차는 미취학아동의 눈으로 봤을 때의 것이니, 지금 다시 보게 된다면 그다지 높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연탄광
그 작은 방 뒤로는 연탄광이 있었는데, 부엌으로만 통했다. 집에서 가장 어둡고 서늘한 곳이었다. 겨울이 되기 전에 대문에서 마당을 지나 부엌으로 들어와 연탄광까지 연탄가루 받치는 깔개를 깔아놓고 연탄을 들이던 장면도 어렴풋 하지만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안방 뒷마루
부엌에서 더 깊숙히 들어오면 안방 뒤로 좁게 난 마루로 올라오는 계단이 있었고, 밥상은 그 곳을 통해 안방에 들여졌다. 겨울에 부엌에서 식혜가 끓고 있노라면 안방 뒷문을 열고 부엌으로 고개를 내밀어 식혜 거품을 떠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식혜가 다 되기를 기다리곤 했다. 다된 식혜가 들통 째 계단 위에 놓이면, 그대로 살얼음이 얼어서 안방 뒷문을 열고 차가운 식혜를 떠다가 냉큼 아랫목으로 돌아갔더랬다. 안방 뒷마루에는 다디미돌 하나와 다디미 방망이 한 쌍이 있었는데, 쓰는 것을 본 적은 없었고, 한 때 썼지만 지금은 쓰지 않는다는 얘기만 들었던 것 같다.
안방
안방은 부엌과 닿은 아랫목 쪽으로 마당으로 통하는 창이 있었다. 그 창을 열어놓으면 툇마루와 마당은 물론 대문까지 내다보였다. 지금 생각컨대, 아랫목에 앉아 마당을 둘러싼 집 곳곳은 물론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까지 한 눈에 다 볼 수 있는 재밌는 창이었다.
밤이면 아랫목 쪽으로 머리를 동으로 둔 채 이불이 깔렸고 서쪽 벽에는 시계와 TV, 전화기, 달력 등이 놓이고 걸리며 안방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북쪽 벽에는 벽 전체를 채우는 검은 자개장이 이불장과 옷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대청
안방에서 가장 큰 문은 네짝으로 되어 대청으로 통하던 문이었다. 대청에서는 서까래가 보였던 것 같은데, 그 높고 어두워 까마득한 천장은 어린 내게 그다지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는지 별다른 기억이 없다. 다만 대청에서 마당으로 통하는 가운데에 어두운 섀시 문이 있었던 것 같고, 한 가운데 둥근 기둥이 놓여 그 너머로는 툇마루로 이어져 있었다. 신발을 벗지 않고 들르는 손님에 간단한 상을 낼 때는 그 툇마루로 내었던 기억이 있다.
건넌방
대청건너에도 방이 하나 있었다. 집 안에서 안방에 이어 두 번 째로 큰 방이었는데, 역시나 안방에 이어 두 번 째로 자주 드나들던 방이었다. 안방과 마찬가지로 대청과 통하는 네짝 문이 있었지만, 그 문은 대부분 쓰이지 않고 마당으로 통하는 문을 통할 때가 더 많았던 듯 하다.
마당
부엌 건넌방과 부엌, 안방, 대청, 대청 건넌방이 둘러싸고 있던 마당은 두 계단 쯤 아래로 옴폭했다. 마당 너머로는 붉은 벽돌의 복층 집 북벽이 보였고, 그 벽에 기대어 1m 안되는 폭의 화단이 석축 위로 잇었는데, 한 가운데에 2층 높이의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하루는 그 큰 나무를 밤중에 내다봤는데, 나무가 거대한 쥐로 둔갑해 있어서 몹시 놀라며 무서워 했더랬는데, 잠을 깨고 어른들께 꿈 얘기를 해줬더니 악몽이라고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악몽'이라는 말을 처음 배우던 순간이었던 셈이다.
마당 가운데 안채에서 먼 쪽으로 수도가 있었다. 그 수도를 틀고 마당 청소를 하면 물기 머금은 돌냄새, 시멘트 냄새가 피어오르곤 했다. 수돗가 쪽으로는 문간방과 화장실이 있었는데, 이 이 문간방은 주로 젊은 부부가 세를 들어 살았던 것 같다.
문간방
하루는 이 문간방에 사는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기가 화장실에 빠져서 건져내지기도 했다. 똥독을 걱정하던 어른과 괜찮다던 아기 엄마의 대화가 어렴풋 한데, 내가 집 밖에 있을 때 일어난 일이라 직접 보지는 못하고 나중에 얘기만 들었다. 그 날 부터 어른들은 화장실 갈 때 마다 바닥을 조심하라고 주의 주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변소
변소는 마당에서 다시 한 두 계단 쯤 올라가서 열리는 가장 구석자리 좁은 문을 두고 있었는데, 문을 열면 타일 박힌 바닥이 다시 한 계단 올라가 있고, 조명은 백열등이 달려있었던 것 같다. 따로 변기가 갖춰져 있지는 않았고, 바지를 내리고 마당을 향해 앉기 전에 아래를 내려다 보면 분뇨와 휴지가 저 아래 고여있는 것이 보이는 구조였다. 똥차가 오면 골목 쪽 문을 열고 굵은 호스를 대고 분뇨를 퍼내곤 했는데, 말끔히 퍼내고 나면 구멍 아래 바닥이 저 아래로 깊게 보여서 더 무서워 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문간방
문간방에서 화장실 반대편으로 대문이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이 대문 왼편, 대문에서 들어설 때는 오른편에 가장 작은 방이 하나 있었다. 이 방도 역시 세를 놓았는데 주로 혼자 사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골목 쪽으로 높이 쪽창이 하나 있었고 좁은 방이나마 좁은 툇마루가 있었던 것 같은데, 툇마루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대문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방이라 볕이 가장 어두웠다. 마당에서도 깊숙히 들어와 있고 골목 쪽으로는 쪽창이니 볕 들 구멍이 그다지 없었으리라.
골목
대문을 나서서 오른편을 보면 아래로 잠시 완만한 경사가 지며 전봇대가 하나 보였다. 완만한 경사가 끝나면서 골목이 살짝 왼쪽으로 어긋나 이어졌는데, 그 경사 때문에 화장실 자리 아래쪽으로는 석축 같은 것이 집을 받치고 있었던 것 같다. 거기에 밖에서 분뇨를 퍼내던 문이 있었다.
골목은 공을 차고 놀기 적당했고, 완만한 경사를 가진 골목을 따라 내려가면 어귀에 작은 복덕방이 하나 있었다. 어린 나에게는 그 아래부터는 동네였고, 그 위로는 골목이었다. 복덕방 반대편으로는 두부공장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고, 두부공장 왼쪽으로는 골목 뒤편으로 이어지는 길이 하나 나 있었다. 두부공장과 복덕방은 좀 더 큰 길을 기준으로 같은 편에 서 있었는데, 그 길 건너편은 작은 가게들이 이어져 있었다. 삼거리 같은 사거리였던 셈이다. 시장 쪽으로 좀 더 가면 오락실이 하나 있었고, 장난감을 파는 문구점도 하나 있었다.
다시 찾은 골목
그 집, 그 골목에서 남겨진 마지막 기억은 80년대 후반 쯤의 것이다. 다시 그 골목을 찾았을 때는 95년 여름 쯤이었다. 골목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관문에서처럼 내 몸이 커진 만큼 작아져 있었고, 살던 집은 물론 그 주변도 모두 사라져 정확히 어느 신축 건물이 내가 살던 터에 세워진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아마도 원룸 건물이 들어선 곳이 내가 살던 집의 터인 듯 했다.
사라진 동네
그로부터 다시 15년이 지났으니 10년이 채 안되고 다시 찾아간 95년 보다 또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 골목 풍경까지 사진으로 보여주는 지도 서비스 덕분에 다시 찾아 본 내가 살던 골목은 이제 꺾어지던 골목도 곧게 펴지고, 좌우로 즐비하던 개량한옥들도 모두 헐렸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다가구, 다세대 주택은 어느 것 하나 예전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없다. 정원이 딸린 양옥집이던 골목 맞은 편 친구 집도 마당 없는 다가구 주택이 되었다. 마치 그 골목과 그 집에서 보냈던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모두 조작된 것 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고향을 잃는 다는 것은 아마 이런 의미일 것이다. 살던 집의 번지수를 외우기에도 너무 어린 나이였던 내가 지금 그 곳에 다시 섰을 때 그 장소를 추억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어주는 것은 단 하나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 남은 하나는 다름 아닌 전봇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