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하동 181번지에는 청전화숙과 함께 청전 이상범 화백의 집이 보존되어 있다. 청전 이상범 화백은 1928년, 조선일보에서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겨 삽화를 그렸는데, 1936년 손기정 옹의 마라톤 금메달 보도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경찰에 잡혀갔다가 풀려난 후 동아일보를 그만두게 된다.


청전 화백이 동아일보에 재직하던 때인 1935년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소설인 <흑두건(黑頭巾)>에도 청전의 삽화가 들어있는데, 그 중에 1935년 2월 9일자 220회 연재에서는 서울 지리, 그 중에서도 서촌에 대한 재미있는 내용이 있어 소개한다.


黑頭巾 <220> - 동아일보(1935.2.9.)

윤백남(尹白南) 작

이청전(李靑田) 화


강항은 동대문박 복차다리께서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야 야주현에 이르기까지에 수없이 술을 사서 먹엇다.

억병같이 취한강은 무슨 생각이 낫던지 야주현에서 위대로 가는 길로 드러섯다.

거기서부터 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어디를 어떠케 헤매고 돌아다니엇던지 그는 금충교 대리에 와서 씨러지고 말엇다.

인적이 끄닌 금충교 돌다리 위에서 그는 업드러진 그 자세대로 인사불성에 빠지고 말엇다.

...(중략)...

그러나 치위보다 더 그를 괴롭게한것은 갈ㅅ증이엇다.

목은 말러부터서 기침을 할 대 마닥 앞엇다. 그리고 입에는 침 한 점이 없어서 혀가 맘대로 돌지 안는다.

이 개천물이 만일에 훨씬 상류이엇더면 그는 의당 개천물이라도 손으로 훔켜서 목을 축엿을것이지마는 금충교 개천은 수채나 다름없는 더러운 물이라 아무리 갈ㅅ증이 심하다 하드라도 차마하니 그 물을 마실 수는 없었다.


인용된 부분에 나오는 지명을 살펴보자면, '복차다리'는 현재의 창신동으로 대략 동대문역과 동묘앞 역 사이 쯤이 되고, 야주현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뒷쪽 당주동 일대를 일컫는다고 한다.


강항이라는 주인공은 동대문에서부터 술을 이어마시며 걷다가 결국 야주현에서 위대로 들어가는 길에 들어선다. 위대는 '웃대'라고도 하는데, 소설에 표기된 것으로 보아 30년대 당시에는 '웃대' 보다는 '위대'라는 발음이 더 일반적이었던 듯 하다. 혹은 30년대 당시 조선시대의 지명을 고증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당주동에서 위대로 접어드는 길이라면 세종문화회관 뒤에서 종교교회 앞을 지나 경복궁역으로 향하는 북서방향의 길이 되는 셈인데, 결국 주인공은 지금의 경복궁역인 금천교 돌다리에 이르러 정신을 잃고 만다.


지금은 '금천교시장'이라는 이름이 가장 흔히 불리는 이름이고, 얼마 전부터는 고약하게도 종로구청에서 '세종마을음식문화의 거리'라는 생뚱맞은 이름을 붙여버리기도 했지만, 예전 신문기사를 찾다보면 '금충교'라고 부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금천교는 1928년에 일제가 길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헐려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흑두건이라는 소설의 배경이 금천교가 헐리기 한참 전인 조선 광해군 때인 탓인 듯 하다.


이 금천교 아래로 흐르는 물은 주인공 강항이 걸어왔던 길을 따라 세종문화회관 뒤를 지나 광화문네거리를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는데, 소설에도 나타나듯 지금의 수성동계곡이 있는 옥류동천 상류나 북악산에서 발원하는 백운동천 상류는 제법 맑은 물이 있어서 빨래터 등이 설치되어 있기도 했다.

참고로 흑두건은 30년대 이후 여러차례 단행본으로 출판된 바 있으며, 작자인 윤백남(1888~1954)은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으로 조선 최초의 희곡을 쓴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의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라고 하면 누구나 알겠지만, 최승희에 무용을 권하고 후에는 최승희의 자서전을 대필하여 출판한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최승일은 서울 출생으로 배재 출신으로 동경일본대학으로 유학을 다녀와 1922년에는 소설 〈상록수〉의 심훈과 함께 염군사(焰群社)에 가담하기도 했던 조선 예술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경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가 서촌과도 인연이 있는 것은 어찌보면 싱거운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또한 각별히 언급될 만 한 장소가 있는 탓에 무심히 지나칠 일도 아닌 듯 하여 자료를 찾아보았다.


동경일본대학 미학과에서 돌아 온 최승일(崔承一)은 대표적으로 북풍회(北風會), 경성청년회(京城靑年會),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프로예맹) 등에서 활동했으며, 그가 활동한 중에 '극문회(劇文會)'와 '라디오극연구회'는 지금의 서촌에 해당하는 사직동과 체부동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중 극문회는 경성으로 돌아온 최승일의 이름이 처음 나오는 계기가 되는데, 처음부터 연극 연구와 강연, 잡지발행 등을 통해 조선의 연극을 개량코자 조직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진취적인 활동을 펼쳐나갔을지, 짐작하게 되는 바가 있다.



劇文會創立 - 동아일보(1922.4.5) 3면

[ 지면보기 ]


사직동 187번지에서 극문회를 시작하고 2년 반 여가 지난 후인 1924년 12월 11일에는 프로(professional 아닌 prolétariat 의미) 작가와 미술가들 50여명 등이 함께 『경성청년(京城靑年)』을 창립하여 청년총동맹(靑年總同盟)에 가입하기로 결의한다. 여기에서 선출된 13인의 집행위원 명단에서도 최승일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京城靑年』發會 - 동아일보(1924.12.13) 2면

[ 지면보기 ]



잠시 경성청년회를 살펴보자면, 경성청년회는 사무실을 재동 84번지에 두었는데, 이 곳은 현재 현대 계동 사옥 서쪽 일대로 현재 84번지는 40여개의 필지로 쪼개어져 있다.


창립 총회 때에 집행위원에 위임한 강령과 사업안을 다음 해 3월 신문지상을 통해 발표한 바 있는데, 그 내용이 당시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있어, 현대어로 바꾸어 옮겨본다.




식민 경성에서 워낙 활발한 활동을 하던 최승일인 만큼, 여기서는 1926년 결성한 '라디오극연구회'만 다룬다. 최승일은 라디오극연구회를 통해 시험 방송을 주도하다가, 경성방송 개국 후에는 방송극을 연출하며 조선 최초의 방송 프로듀서가 되었다. 당연히도 이 때에 최승일이 연출한 방송극은 조선 최초의 방송극이다. 또한 그의 아내 마현경은 경성방송 첫 공채 아나운서로 그 전까지 진행을 맡던 이옥경 아나운서와 함께 조선 최초의 아나운서이기도 하다.


경성방송국 개국 전의 최승일이 이끌던 라디오극연구회의 주소는 체부동 137번지이다. 



라듸오劇硏究會創立 - 동아일보(1926.6.27)


기사는 '이달 그믐께'(1926년 7월 초순)에 체부동 137번지에서 최승희 원작 이경손 각색의 단막극 <파멸(破滅)>을 공개 시험할 예정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1925년 6월 무렵부터 시험방송을 했다고는 하지만, 아나운서가 없어 기술국 직원이 번갈아 아나운서 역할을 해오다가 1927년 2월 16일에야 경성방송국의 첫 전파가 송출되었다고 하니, 어쩌면 이 때 공개 시험으로 진행 된 <파멸>은 조선 최초의 라디오극으로 쓰여진 작품이지 않았을까. 경성방송국은 조선중앙방송국과 한국방송(KBS)의 전신이다.

서촌에 한 번 쯤 와봤다면 들르는 체부동의 토속촌삼계탕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다녀간 집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후로 손님의 매해 늘어 이제는 일곱 채의 한옥을 식당으로 쓰고 주변의 빌라를 조리실 및 숙소 용도로 매입하는데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주차장도 부족하여 골목 건너편의 집들을 매입해서 지난 1년 사이에 가옥을 모두 철거하고 주차장으로 만들었는데 체부동 137번지 가옥이 이 때에 헐려나가고 말았다. [ 다음로드뷰로 보기 ]


최승일의 극문회가 자리잡은 사직동 187번지도 언제 사라졌는지 현재는 광화문풍림스페이스본 106동 서쪽 골목 어귀에 187-1이라는 지번만 남아있다. [ 다음로드뷰로 보기 ]


마지막에서 밝히자면 이 포스팅은 70년대 초중반에 걸쳐 체부동 138번지에 거주하셨던 분의 말씀을 따라 혹시나 관련한 역사가 있는지 찾아보던 중, 체부동 137번지에 대한 kurtnam 님의 포스팅 [ 기록에 관한 기록 ]을 찾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삼계탕집 주차장 부지에서 드러나는 철거된 역사에 대한 아쉬움은 역사의 기록과 그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그 망각에 대한 형벌이란 이처럼 무섭도록 정직하게 내려지고 만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