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람이라도 인왕산과 북악산을 정확하게 구분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인왕산 호랑이라는 말도 흔하고 청와대 뒷배경으로 우뚝 선 북악산도 화면을 통해 자주 접할 수 있지만 세종로에 서면 북악만 보일 뿐 인왕을 보기는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인왕이 숨겨진 산이 되어버린 데에는 광화문 바로 앞에 말의 눈가리개처럼 세워놓은 정부종합청사 건물도 톡톡히 한 몫 하고 있다.


지난 달 수성동 계곡이 복원사업을 마치고 일반에 개방되었으니 이 계곡을 오가며 인왕의 능선을 눈에 익힐 기회는 늘어난 셈이니 인왕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낯익게 다가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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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동 계곡 기린교 앞에서 바라본 인왕산 / _IMG_0478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수성동 계곡에서 올려다 본 모습에서는 인왕산 중에서도 정상을 이루고 있는 치마바위가 시야를 채우는데, 치마바위 바로 북쪽 골짜기는 너무나 가파라 치마바위 발치에 있는 석굴암에서 길이 끊긴다. 석굴암 오르는 길 바로 다음 계곡으로 만수천을 지나 북쪽 능선을 타고 정상에 이르는 길이 있는데, 서촌에서 인왕을 오르기에는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등산로가 된다.


다른 동네에서 등산 오는 분들은 등산복에 장비까지 채비를 잘 갖추고 오기도 하지만, 말하자면 서촌의 동네 뒷산이라고 할 수 있는 인왕산은 마음 내키면 샌들 신고 올라가도 충분한 산이다. 하지만 그 가파른 산길은 짧지만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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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정상에서 남쪽 능선을 따라 이어진 성곽길 / _IMG_2577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 사진 가운데 부분을 가로지르며 내려가는 짙은 골짜기가 인왕천이 있는 등산로이다.


지난 주말에는 만수천을 거쳐 정상에 올랐다가 성곽을 따라 사직단으로 내려오는 길 중간에서 왼쪽으로 길을 틀어 인왕천을 따라 내려와봤다. 만수천으로 오르는 길도 가파르다 했지만 인왕천 길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인왕천과 만수천 모두 수성동 계곡으로 흘러들지만 인왕천은 말 그대로 인왕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물줄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풍경도 바로 곁에 있는 다른 골짜기와 사뭇 다른 것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 수 없는 구멍이 뚫린 바위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되기도 하고, 가파른 골짜기 따라 비좁게 나있는 돌계단길도 인왕산 자연암을 깎아 계단으로 만든 구간이 훨씬 길게 분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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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천 골짜기에서 보이는 독특한 모양의 바위 / _IMG_2584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인왕산이라는 이름은 조선에 들어 붙여진 이름인데, 인왕사라는 절이 있다고 해서 인왕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 전에는 '서봉(西峰)' 혹은 '서산(西山)'이라 불리웠다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도 태종이 사직단 자리를 정하는 부분에서 인왕산을 서봉이라고 언급한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인왕산의 한자 표기는 仁王山 으로 주로 쓰이는데, 일제 시대에 가운데 임금 왕('王') 자를 일본의 왕을 뜻하는 성할 왕('旺')으로 조작하였다 하여 성할 왕을 피해 仁王山 이라는 표기를 선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도 비록 한 번에 불과하지만 인왕산을 표기할 때에 성할 왕을 사용한 적이 있으니 딱히 일제의 조작에 의해서 성할 왕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한 것인 듯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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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천 약수터 옆에 새겨져 있는 바위 글자 / _IMG_2585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하지만 해방 이후 극일감정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인왕천 옆에 새겨진 바위 글씨를 보면 가운데의 성할 왕 자의 날일 변이 지워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좌우 살필 것 없이 일제의 흔적이라면 없애버리고 싶었던 감정도 부당하다 할 것은 아니지만, 전후를 살피고 정확한 근거에 따라 판단하고 보전 여부를 결정하는 냉철함에 있어서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다.


인왕천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는 길은 가파른 경사 탓에 딛고 내려갈 바위에서 눈을 떼기 힘들다. 하나씩 바위를 밟고 내려가던 도중 재미있는 돌 하나를 발견했는데, 계단석 중 하나로 쓰이고 있는 돌에 글씨가 새겨진 흔적이 눈에 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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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천 골짜기의 계단석 중 하나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 / _IMG_2581_ep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사진으로 바위를 촬영할 때에는 왕대곤('王大坤')으로 읽었는데, 이미지를 살펴보면 첫 글자가 모호하다. 글씨가 새겨진 바위를 깨서 계단으로 놓은 것인지, 글씨를 새기다 잘못된 것을 계단으로 쌓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호기심에 사람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앞 글자를 성씨 김('金')이라 가정하여 인물을 찾아봤더니 순조(19세기 초) 때에 홍문관(弘文館)을 한 인물이 한 명 검색된다.


김대곤(金大坤), 본관은 서흥으로 순조 16년 병자식 을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무안현감(行務安縣監)을 지냈다고 한다.


엉뚱한 돌을 보고 엉뚱한 사람을 찾아낸 것인지는 몰라도 호기심을 가지고 동네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런 뜻하지 않은 것들과 만나게 되는 기회가 종종 생기곤 하는 것이 서촌에 사는 큰 즐거움 중 하나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버스정류장 근처를 오가다 보면 리틀 브라운은 눈에 잘 띠어도 그 옆에 있는 가게는 눈에 잘 안들어온다. '끼니와 새참'이라는 가게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언제부터 석장 짜리 대자보가 붙어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처음 발견한 것은 지난 달 23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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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근래에 서촌이 겪고 있는 변화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자리잡고 있던 가게이다. 이와 비슷한 가게들은 지금 동네에서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자하문로 양편으로는 바로 옆의 전산소모품 가게 처럼 인쇄용품이나 허름한 옷가게들도 꽤나 있는 편이지만 최근 들어 속속 문을 닫고 있다. 자하문로는 왕복 6차선 도로다. 대로변인 만큼 변화가 가장 먼저 드러나는 곳일 수 밖에 없다. 문제가 있다면 이러한 맥락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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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2276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전 모롤화점 주인님! 앞으론 법대로 외치시더니 뒤로는 몇십년을 세금포탈하셨더군요. 임대수입이 있으면 반드시 세금신고 하셨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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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2280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저는 권리금 한 푼 없이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참담하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적습니다. 10여년전 2003년 8월 보증금 1300만원 권리시설비 합 4,000만원에 생계를 목적으로 장사를 하면서 임대료 한 번 밀려 본 적 없었습니다. 재계약시 마다 임대료를 올려주어 현재는 월 90만원씩 임대료를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2011년 5월 말 경 전 모롤화점 주인은 갑자기 2011.6.9 까지 가게를 비우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하였고, 계약기간이 남았으니 계속장사를 하겠다 하였습니다.

그 후로 모롤화점 주인은 제 가게만 임대료를 받으러 오지않고 양쪽 옆가게들만 몰래와서 받아가곤 했습니다. 지난 10여년동안 오로지 현금으로(월 90만원)만 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계좌번호는 구경도 못하고 계약서상의 근거로 임대료를 받아 가실것과 계좌번호 보내달라는 내용증명을 보냈고 휴대폰 문자로도 몇 번 보냈지만 아무런 답이 없어 우체국을 통하여 우편환으로 2회에 걸쳐 임대료를 보내니 모롤화점 주인은 임대료를 보내지 말 것과 명도소송하겠다는 내용증명을 보내온 것입니다. 모롤화점 주인은 고의로 피하면서까지 임대료 3개월 이상 밀리면 명도할 수 있는 법적 근거의 만행을 법이라는 잣대에 맞추어 계획적으로 쫓아내려고 온갖 횡포와 수단과 방법을 지금도 자행하고 있고 어쩔 수 없이 3개월 임대료 밀린 원인으로 권리금도 한 푼 없이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에는 양자의 이해와 입장이 서로 엇갈리는 것이겠지만, 일단 대자보의 내용만 봤을 때에는 충분히 억울할 일이고,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참 고약한 경우다. 앞에서는 '전 모롤화점 주인'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모롤화점 주인이 바뀌었고 현재의 주인이 아닌 예전 주인이 당사자가 되는 듯 하다. 그렇다면 지금 모롤화점에 붙어있는 'SINCE 1948'는 주인이 바뀌어도 계속되는 근거가 뭘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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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2545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왕복 6차선 도로 변에 있는 가게가 재계약 때마다 세를 올려주어서 현재 월 90만원이라면 결코 비싼 세는 아니다. 자하문로 이면에 있는 왕복 2차선 도로변에도 월세로 100만원을 부르는 것이 요즘의 동네 호가인 것을 감안하면 월 90만원은 상당히 싼 편이다. 그렇다고 월세 100을 부르는 자리라고 모두 점포가 입주해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2년 새에 호가는 2배 이상 높아졌지만 실제 그만큼 장사가 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국 기존 상인들은 임대료 상승으로 쫓겨나가고 가게는 비워진 채 건물주도 임대수익을 올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근래의 동네 현황으로 보인다.


새로 가게를 들이는 데 성공한 경우, 건물주는 이득을 본다. 반대로 새로 들어온 세입자는 가게를 뺄 때 받아 낼 권리금 외에는 이익을 보기 힘들어진다. 결국 집주인만 돈을 번다.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 상인들은 내 가게가 아닌 이상에야 열심히 일해서 임대료 올려주고 나면 권리금 밖에 손에 쥘 것이 없다.


그래서인지, 요즘 동네에 새로 열리는 가게들 중에는 장사에는 관심 없고 권리금만 노리고 들어온 신선같은 가게들이 많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인심 좋은 재밌는 가게라고 트위터에, 블로그에 자발적으로 광고도 해준다. 작년 가을부터 눈에 도드라지기 시작한 흐름이다. 실제 삼청동과 같은 동네에서 장사는 못해도 권리금만 잘 챙기면 돈 벌어 나오는 경험을 통해 돈버는 법을 배워온 이들이 적지 않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세가 뛰고 권리금이 붙다보면 결국 장사하는 사람은 더 이상 자리 잡을 수 없는 동네가 된다. 높은 세와 권리금이 정착된 자리에는 오로지 대기업 프랜차이즈만 들어올 수 있다. 그 수익률을 떠받치려면 동네 거주자들로는 부족하다. 삼청동, 인사동 처럼 관광객들, 방문객들이 북적여야 한다. 다시 말해 사람사는 동네가 아니어야 한다. 삼청동이 고향이던 사람들은 이미 모두 고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요즘 서촌 사람들은 다들 옆동네 삼청동의 모습을 떠올리며 두려워 한다.


임대료는 올라가고, 못 보던 가게는 늘어난다. 권리금이 생겨나고 사람들이 늘어나면 이제 사람 사는 동네는 더 이상 어렵다. 그런 흐름이 '끼니와 새참'에 붙은 대자보에서 읽힌다. 고민은 갈수록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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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1255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서촌은 한성 도읍의 서쪽 동네라는 뜻으로, 인왕산 아래에 있는 동네를 부르는 말입니다. 동이름으로 꼽자면 가장 유명한 효자동부터, 청운동, 궁정동, 창성동, 신교동, 옥인동, 통인동, 누상동, 누하동, 체부동, 통의동, 필운동, 사직동, 내자동, 적선동까지. 서울 도시철도 3호선 경복궁역에 가까운 동네라고 하는 것이 가장 알기 쉬운 설명이 될 것입니다. 요즘에는 북촌 한옥마을이 유명해진 덕분에 경복궁 동쪽이 북촌이고 서쪽이 서촌이라고 쉽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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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1275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서촌이라는 이름이 언제 처음 붙여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에 동서분당으로 ‘동인’과 ‘서인’이라는 이름이 생겨날 때에 서촌에 사는 사람이 많은 쪽을 서인이라 이름 붙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적어도 수백년은 된 이름일 것입니다. 조선의 가장 대표적인 활터 다섯 군데인 서촌오사정(西村五射亭)이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 필운동, 삼청동에 걸쳐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 우리가 ‘서촌’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부르기 시작하는 동네가 조선시대에 부르던 범위와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름만 오래된 것이 아닙니다. 조선시대 한성 지도를 펼쳐보실 기회가 있다면 지금의 서촌 일대 지도와 함께 번갈아 보며 비교해보세요. 20년 전에 새로 난 길을 빼고 보면, 조선시대 지도의 길이 지금도 그대로 골목으로 남아있는 곳이 서촌입니다. 골목 바닥에는 블럭이 깔리고 담장은 개량 한옥의 붉은 벽돌이나 일식가옥, 때로는 빌라로 바뀌었어도, 조선시대 서촌 사람들이 걷던 길 모양 만큼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골목길 만이 아닙니다. 경복궁역에서 자하문터널까지 이어지는 큰 길은 ‘백운동천’이 흐르던 물길 따라 길을 낸 탓에 폭이 일정하게 직선으로 뻗은 도로가 아니라 좁았다 넓어지곤 하는 구불구불한 8차선 도로가 되었습니다. 인왕산에서 뻗어 내려온 능선과 골짜기를 경계삼아 작은 동네가 갈리는 이유로, 앞서 꼽아본 것 처럼 서촌에는 법정동만 열다섯 개에 이릅니다. 골짜기 따라 사람들이 다니던 자취가 골목이 되었고, 골목 끝에 닿았던 스무평 남짓한 자그마한 집자리들이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함 없이 그대로입니다. 모양 뿐 아니라, 굽이굽이 걷다보면 골목 모퉁이 너머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도, 골목 어귀마다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것도 예전 그대로 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각종 전문기술을 가지고 있던 중인 계급의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옥인동 재개발구역으로 더 많이 알려진 송석원 일대는 조선의 중인문학으로서 ‘골목문학’이라는 뜻의 위항문학(혹은 여향문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 곁으로는 겸재 정선이 살던 인곡정사가 있었고, 겸재는 지금의 마을버스 종점에 있는 수성동 계곡과 송석원이 있던 옥류동을 그렸습니다.

이런 것을 동네의 내력이라고 하는 것인지, 시인 이상이 태어나서 성장했고 시인 윤동주가 소설가 김송의 집을 찾아 하숙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청전 이상범, 박노수, 노천명, 이중섭, 구본웅, 천경자, 김동진 등 길을 걸으며 꼽게 되는 예술가의 이름만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온전히 품고 간직해온 동네의 비결은 안타깝게도 밝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못됩니다. 군사독재 시절 내내 청와대에 가장 가까운 동네라는 이유로 아궁이라도 고치려면 신고를 해야 했고, 옥상에 빨래라도 널러 올라가면 경호원이 쫓아왔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집니다. 수십년 동안 불편을 감수하고 견뎌온 시간이 결국 다른 동네의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밑거름이 된 셈입니다.

이런 서촌에 처음으로 찾아온 개발의 파도는 골목과 집들 가운데로 아스팔트 길을 내고 주거환경정비구역 지정으로 초가집과 기와집이 헐린 자리에 빌라가 들어서던 1990년대입니다. 산업화 시대에 서울로 밀려들던 인구에 더해 청계천 복개로 쫓겨온 사람들까지 들어오면서 초가집 칸칸이 한지붕 여러가족으로 사는 집이 흔했을 정도로 열악했던 주거환경을 생각하면, 개발이라고 해서 마냥 눈살 찌푸릴 일 만은 아닌 듯도 하지만, 동네가 옛모습을 가장 많이 잃어버린 때가 이 때였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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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1513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그 다음 파도는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왔습니다. 아직도 구역지정이 해제되지 않고 있는 옥인동, 누하동, 필운동, 체부동에 아파트가 들어선 조감도가 동네 곳곳에 붙고, 건설사의 명절 인사 현수막이 내걸리던 때가 불과 몇 년 전입니다. 재개발을 앞두고 어차피 헐릴 집이라는 이유로 수리를 미루던 집들은 그 몇 년 사이에 부쩍 낡아버린 탓에, 여름에 폭우가 지나간 동네엔 무너진 집을 세고,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집 안에 텐트를 치는 집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서울시의 한옥보존 정책으로 그나마 근래에는 집 고쳐짓는 소리가 잦아지고 있긴 하지만, 이미 낡아버린 집과 아직 재개발이 포기되지 않은 채 갈등을 겪고 있는 옥인동 재개발 구역은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이제 새로이 덮쳐오고 있는 새로운 파도는 상업화와 관 주도의 테마파크화입니다. 삼청동과 북촌은 이미 ‘삼청동화’, ‘북촌화’라는 말이 통할 정도로 동네사람 누구나 걱정하는 나쁜 선례가 됐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삶은 아랑곳 없이 오래된 골목과 옛 향수를 자극하는 동네의 모습만을 구경하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만을 위해 문을 연 상업시설들은 동네를 지켜온 주민들에게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가게가 늘어나면서 부동산 시세가 들썩이면 결국 주민들은 쫓겨나야 하는 운명에 놓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똑같이 동네를 보러 오더라도 동네 사람들이 운영하는 가게를 더 많이 이용하고, 동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더 나은 동네를 위한 고민을 함께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됩니다.

여기에 더해, 관에서는 북촌 한옥마을 조성을 본따 동네 곳곳에 가득한 유명인들의 자취를 기념관으로 되살리고 격식 높은 기와지붕으로 동네를 테마파크화하려는 계획을 하나씩 실행에 옮기고 있습니다. 동네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예술가들의 이름을 이용해서 동네 사람들이 삶을 일구던 공간에 사람이 살지 않는 기념관과 전시관을 조성하려는 계획은 동네에 살고 있는 입장에서 그다지 반길 만 한 소식으로 들리지는 않습니다.

서촌은 낡은 동네이지만 또한 시간을 품고 있는 동네이기도 합니다. 삶을 부정하고 개발이익을 쫓는 광풍에서 비껴있던 개발의 비무장지대 같은 동네였습니다. 하지만 집을 헐고 땅을 깎아 아파트를 지어올리는 재개발이 서촌의 일부에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고, 다른 곳에서는 동네를 지켜온 삶의 자리를 뒤흔드는 또다른 얼굴을 한 재개발도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서촌은 우리가 개발의 시대를 지나오며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질문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도시의 모습인가에 대한 질문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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