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은 생각 보다 급진적이다. 그 배경과 내용 면에서 그렇다. 물론 그렇지 않은 면도 꼽아보면 있겠지만, 93년 전의 생각과 말이라 치면 급진적이라 평가할 수 있는 내용과 마찬가지로 고루하다 평가할 수 있는 내용 또한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마치 지금의 이야기 같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93년 동안 어린이날은 한 발짝도 진전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1923년 5월 1일 동아일보 보도를 보면 "조선의 어린이여 그대들에게 복이 있으라. 조선의 부형이여 그대들에게 정성이 있으라"라는 문장이 나온다. 93년이 지났음을 감안한다면 '조선의 부형들이여, 그대들에게 반성이 있으라'라는 말이 나와도 전혀 과할 것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단적인 예로 93년전 시내(현 종로구와 중구 일대)에 12만부가 배포된 선전물의 내용에는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시오"라는 어른에 대한 당부가 나온다. 한국어를 못알아듣는 외국인에게도, 말을 못알아듣는 영아에게도 기본적으로 경어를 쓰는 입장에서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는 것에 대해 놀랍다는 반응 뿐만 아니라 거부감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반응을 접해 온 입장에서, 물질적 풍요로 인해 자연스럽게 해결된 내용들을 제하고 실제 어린이에 대한 대우가 정말 나아진 것이 있는지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 표면적인 태도만 해도 이러한데 그 속마음까지 따져 볼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얼마 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얼마 전 드러난 그 이후로 지속적으로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구호가 어린이도 아닌 청소년운동의 지속적인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것만 봐도 그렇다. 1923년 당시의 기준으로는 지금의 청소년 대부분이 어른으로 인식되었을 수 밖에 없었음을 감안하면 지금의 현실은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현 시대 '어른'들에게 어린이날은 '반성'의 날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93년을 지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진보는 커녕 퇴행의 방증만이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으니 말이다. 어린이날이 1년에 한 번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해주거나 선물 상자 쥐어주는 것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거나 왜곡되어 버린 것만 해도 어린이날이 '어른들의 반성의 날'이 되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3년 전, 1923년 어린이날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나의 할머니는 증손녀를 보았다. 그 '증손녀'와 함께 나는 93년 전 어린이날에 12만부의 선전물이 배포되었던 종로의 어린이날 어린이집 행사에 참석할 계획이다. 방정환의 집은 재개발구역으로 묶여있고, 나는 다른 재개발구역으로 이사를 마쳤다. 여전히 어린이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문화는 이 사회의 일반이 아니다. 보호와 훈육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어제오늘 SNS상에 공유된 안전 강박을 떨쳐낸 놀이터를 소개한 기사가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그런 의미에서 1923년 5월 1일 동아일보 지면을 소개한다. 1923년 어린이날을 제안한 의의와 배경을 비평적으로 곱씹으며 2016년 어린이날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대중교통과 보행환경에 있어서 '장애인이 편하면 모두가 편하다'는 구호처럼 '어린이가 존중되면 누구나 존중된다'는 구호도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되새겨 봤으면 한다. 단순 보호의 대상으로서의 어린이가 아니라 존중의 대상으로서의 어린이로서.

한 세기가 지나도록 깨닫지 못했다면 반성해야 하고, 한 세기가 지나도록 변화하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그 변화를 고민하고 모색해야 할 것이다.




오늘 어린이날. 동아일보, 19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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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오 세 시부터 약 이천 명의 소년을 모여가지고 시내에서 굉장히 선전행렬을 할 계획이었으나 행렬에 대하여는 상습적으로 금지의 수단을 쓰는 조선의 경찰당국이라 어찌 허가 되기를 바라겠는가. 부득이 중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기타의 계획은 대개 예정대로 하게 되었는데 차례대로 보도하면 다음과 같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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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만 장
시내의 선전은 선전지 십이만 장을 네 구역에 나누어 가가호호에 배포할 텐데 구역은 종로를 중심으로 네 거리를 표준하여 나누어 가지고 각 구(區)를 다시 각 부(部)로 나누어 한 부에 오십 명 씩 패를 짜가지고 가가호호에 배포할 터인데 그 선전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더라.

...

어른에게 드리는 글
하나,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치켜다 보아주시오.
하나, 어린이를 늘 가까이 하시자고 이야기하여 주시오.
하나,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시오.
하나, 이발이나 목욕, 의복 같은 것을 때맞춰 하도록 하여주시오.
하나,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시오.
하나, 산보와 원족(遠足) 같은 것을 가끔가끔 시켜주시오.
하나,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에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자세히 타일러주시오.
하나, 대우주의 뇌신경(腦神經)의 말초는 늙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젊은 이에게도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 그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

어린동무들에게
하나,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하나, 어른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끼리도 서로 존대하기로 합시다.
하나, 뒷간이나 담벽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 같은 것을 그리지 말기로 합시다.
하나, 길가에서 떼를 지어 놀거나 유리 같은 것을 버리지 말기로 합시다.
하나, 꽃이나 풀을 꺾지 말고 동물을 사랑하기로 합시다.
하나, 전차나 기차에서는 어른에게 자리를 사양하기로 합시다.
하나, 입은 꼭 다물고 몸은 바르게 가지려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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