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소식지 매거진 내셔널트러스트 30호 [내셔널트러스트 여행]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nationaltrust.tistory.com/107



장면 1. 현자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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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5024 by Kim Hanwool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무언가 찾아 집집을 찾아 헤메는 이가 서촌의 골목을 바삐 걷는다. 술 좋아하는 체부동 김씨와 바둑 좋아하는 누각동 김씨까지 찾아 가 봤지만 모두 허탕이었다. 해는 인왕산을 넘어 처마 밑으로 어둠이 피어나고 있었다. 며칠 공을 치니 마음은 더 급해졌다. 귓가에 거문고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누각동 이만호 집이 머리를 스친다. 김홍기가 거문고를 좋아하는 그의 집을 자주 찾는다는 이야기를 김홍기의 아들로부터 직접 들었다. 조용히 대문을 밀고 들어가 가쁜 숨을 고르며 거문고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묻는다.


“실례지만, 어느 분이 김노인이십니까?”


“여기에 김씨는 없소. 홍기를 찾나본데, 와도 예정이 없고 가도 언제 온다 않으며, 올 때는 하루에 두세 번도 오지만 오지 않을 때는 해를 넘기는 사람이오.”


날이 기울었으니 그가 다닌다 하는 집들을 물어서 다음 날에 기대해 볼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다음날, 다시 걸음을 서둘렀다. 그렇게 몇 집을 찾아갔을까. 지난 밤 술겨루기를 하곤 아침녘에 취기와 함께 먼 길을 떠났다는 답만 덩그러니 남았다.


김홍기라는 사람은 두루 세상의 이치를 꿰뚫고 있어 김신선이라고도 불리는 인물이다. 그를 찾는 이는 연암 박지원. 그의 지혜가 우울증에도 효험이 있다는 얘기를 마음에 새겨뒀다가 사람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신선은 찾지 못하고 만다.


서촌의 18세기 풍경을 아련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게 해주는 연암 박지원의 <김신선전(金神仙傳)> 내용이다.


조선의 지도를 들고 서촌의 골목을 걷다


연암의 <김신선전(金神仙傳)>은 체부동과 누각동에서 시작된다. 누각동은 누상동과 누하동의 옛 이름이다. 숨은 현자 김신선과 그를 찾는 박지원의 추적은 서촌의 골목 어디 쯤에서 엇갈리고 있었을까. 운 좋게도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


<도성대지도>는 조선의 서울을 가장 크고 세세하게 그린 지도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되었으니 <김신선전>의 인물들의 발걸음이 일으킨 먼지가 막 가라앉을 즈음이다. 붉은 선으로 길을 긋고 푸른 선으로 물을 그렸다. 물길을 덮은 아스팔트 아래로는 오늘도 청계로 향하는 물이 흐르고, 골목길을 덮은 보도블록 위로는 오늘도 서촌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18세기 조선시대 지도를 들고도 21세기의 골목길을 찾아 걸을 수 있는 곳, 바로 서촌이다.



[ 도성대지도(일부, 서촌) | 공공누리:문화재청 ]


지도를 보면 인왕산 아래 옥류동 물길 옆으로 구불구불 내려오던 골목길이 갑자기 한 곳에 모인다. 동네 밖으로 나갈 땐 모두가 만나는 곳이고, 동네로 들어설 땐 함께 들어와 흩어지는 곳이다. 길의 갈래는 다섯 갈래. 누하동 오거리다.


오거리는 조선시대 누하동 안의 작은 동네 이름들 중 하나로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다섯 오(五), 클 거(巨), 마을 리(里), 오거리(五巨里)다. 지금은 근처에 자리잡은 슈퍼마켓 이름으로 남아있다. 얼마 전까지는 마을버스 정류장 이름으로도 남아있었지만 서촌에 한옥마을이라는 이름이 덧씌워지면서 마을버스 정류장 이름에서는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서촌 사람들은 여전히 그 정류장을 오거리라 부른다.


누하동 오거리는 누하동, 체부동, 통인동, 필운동의 경계가 만나는 곳이다. 18세기 신선을 찾는 발길이 체부동에서 누각동으로 향했다면 지금의 누하동 오거리를 지나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오래된 골목, 그 길과 길이 만나고 흩어지는 곳마다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발걸음. 옛 사람들이 걷던 길을 그대로 우리가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살갗으로 느껴지는 역사의 깊은 호흡은 서촌이 간직한 시간의 숨결이고, 서촌이 시간을 담고 있는 방식이다.


장면 2. 단짝 친구의 선물


서너살 쯤 나이 차가 있어 보이는 두 아이가 오거리에서 인사를 나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한 아이가 몸이 불편하여 입학이 늦어진 바람에 둘은 동급생으로 몇 해를 지내며 둘도 없는 단짝 친구가 됐다. 함께 걷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끊어진듯 이어지다가도 통하는 듯 막다른 길이었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유년에 동네의 골목길을 탐험하듯 돌아 다니다 보면 길 잃고 헤메는 일도 더러 있기 마련이다. 둘은 그렇게 동네의 골목길을 함께 걷다가 헤어지곤 했다.


친구는 나무로 만든 그림도구 상자를 선물했다. 마음에 쏙 드는 선물에 마음이 들뜬 아이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별명을 ‘나무 상자’라는 뜻으로 지었다. 한자로 이상(李箱). 김해경이라는 본명 보다 직접 지은 이름을 더 자주 쓰게 된 것은 순전히 이 동네 단짝 친구, 구본웅 덕분이었다.


서촌의 시간은 길로 이어진다


한국의 툴루즈 로트렉이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한 서양화가 구본웅과 구본웅의 그림 <친구의 초상>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인 이상은 평생 친구이자 동네 친구였다. 누하동 오거리는 구본웅의 집과 이상의 집을 이어주고 있다. 그들이 걸었던 구불구불 막히기도 이어지기도 하던 골목은 이상의 시 <오감도>에 아해들이 질주하는 무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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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1275 by Kim Hanwool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20년 전에 새로 놓인 넓은 찻길을 피해서 골목으로 다니는 서촌의 아이들은 누하동 오거리에 익숙하다. 필운동으로, 누하동으로, 누상동으로, 통인동으로, 체부동으로 만나고 갈라지는 오거리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인사가 더 빈번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누가 알까. 지금도 일생에 남을 선물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우정을 키워가고 있는 어느 미래의 시인과 화가가 저 오거리를 지나고 있을지 말이다. 그렇게 서촌의 골목은 옛 이야기에만 머물지 않고 오늘의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 서촌이 시간을 이어주는 방식이다.


장면 3. 캔버스를 들고 오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전쟁의 포화에도 불구하고 불행 중 다행으로 서촌에는 폭격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오거리는 마치 언제 전쟁이 있었냐는 듯 평화로웠다. 캔버스와 물감을 들고 오거리를 지나는 화가의 마음을 예외로 한다면 말이다.


고향 떠난 고된 피난 생활이 결국 가족을 갈라놓았고, 그 후로 홀로 전국을 전전하다가 휴전 이듬해, 누상동의 고향 선배 집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가족과 다시 한 집에서 살 수 있는 방편의 하나로 개인전을 준비하기로 한 것이다. 가족과 그림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던 그의 발걸음은 재회의 희망에 부풀어 한결 가벼웠을 것이다. 그 마음을 담아 그린 작품에 <도원>과 <길떠나는 가족> 같은 제목을 붙였다. 가족과 함께하는 행복한 시간과 피난 가던 때를 화폭에 옮긴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이중섭이다.


삶과 예술이 이어지는 시간의 교차로


누하동 오거리에는 수많은 화가들의 이름이 수놓여있다. 전쟁이 끝나고 속속 서촌으로 화가들이 모여든 것이다. 피난 시절, 이중섭과 함께 부산에서 단체전을 열었던 이봉상 화백의 집은 누하동 오거리에서 몇 걸음 안되는 곳이다. 이봉상 화백과 누하동 오거리를 사이에 두고는 천경자 화백도 자리를 잡았다. 이중섭, 이봉상과 부산에서 함께 단체전을 열었던 한묵 화백도 곧 이웃이 되었다. 누하동 오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만나고 인사하며 그림을 이야기 했을 전후 서양화가의 발자취가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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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5010 by Kim Hanwool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서촌엔 이미 당대 최고의 동양화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청전 이상범 화백은 이미 오래전 누하동에 청전화숙을 열어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고 있었다. 그의 스승은 심전 안중식이었고, 심전의 스승은 오원 장승업이었다. 시상대 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도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던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우는 작업을 맡았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은 후 언론사를 나와 후진 양성에 더욱 힘을 쏟고 있었다. 그의 집에 하숙을 하던 이 중에는 10대의 박노수도 있었다.


미술관 전시를 통해서만 만나던 이름들이 누하동 오거리를 만나면 살가운 이야기들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같은 곳에 출퇴근을 하던 이들 중에 독신이었던 한묵 화백은 이봉상 화백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 일이 잦았고 종종 천경자 화백의 집에서 끼니를 신세지기도 했다. 출근길에 누하동 오거리를 지나 이웃집에 들러 아침밥을 먹는 풍경에서 화가는 예술가 이전에 동네 삼촌이다. 언제든 달려가서 고민을 털어놓고 위안을 주고 또 받던 이웃들이 누하동 오거리를 오가며 이웃의 정을 쌓아온 것이다.


천경자 화백이 살던 누하동 집은 예술가 몇몇이 아뜰리에로 사용하고 있고, 곳곳에 화가들의 작업실이 있다. 오거리를 통해 오가며 정을 나누는 이웃 사이는 지금도 오거리에 서면 가던 길 멈춰 서서 한참을 이야기 나누는 동네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대로 다시 찾아 볼 수 있다.


시간의 골목, 시간의 교차로


서촌을 살다 간 이들의 이름을 모두 꼽으려면 숨이 차오를 정도다. 시인 노천명은 천경자 화백이 오거리를 오가며 인사를 나누던 사이였다. 노천명 시인의 집 맞은 편에는 염상섭의 생가가 있었다. 같은 나이의 수주 변영로가 신교동에 살았다 하니 통인동 골목으로 오거리를 지나 친구의 집으로 향하는 장면도 떠올려 볼 수 있다. 김복진과 이여성은 당대 얼마 되지 않는 대표적 예술인 독립운동가로 두 사람의 집을 잇는 길 역시 누하동 오거리가 된다. 이여성은 청전 이상범과 함께 전시를 열었고, 김복진은 구본웅에게 조각을 가르쳤다. 



[ 누하동 오거리 지도 | 서촌주거공간연구회 ]


그 무수한 이름들이 누하동 오거리에 놓이는 순간 우리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역사 속 아련한 인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길, 이 거리를 지금도 걷고 있는 누군가 처럼 느껴지는 경험 말이다. 구불구불 복잡하게 그물처럼 얽힌 골목처럼 시대의 이름들이 골목으로 얽히며 시간의 살아있는 숨결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누하동 오거리, 골목의 숨결을 이어가는 방법


누하동 오거리에는 오래된 건물이 얼마 없다. 올해로 상수(上壽)를 맞은 한묵 화백이 50년 전에 살던 누각같은 2층 집도 지금은 자취를 알 수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 길이 아직 남아있다는 점이다. 재개발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가면 집은 물론 길까지 모조리 흔적없이 사라지는 시대에 조선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역사의 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는 길이 남아있고 그 길을 오늘도 이야기를 이어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문화유산이라 하면 고색 창연한 건축물만을 떠올리며 그 안을 드나들던 사람들이 걷던 길과 그 위에 놓여진 이야기의 호흡은 자칫 놓쳐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누하동 오거리는 오래된 건물 보다는 오래된 길과 이야기를 읽는 눈을 불러낸다. 그 눈으로 역사 속의 이야기와 오늘의 삶을 함께 읽어낼 때, 우리의 삶 자체도 문화유산과 함께 빛을 발하는 살아있는 역사로 새겨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 서촌주거공간연구회(최문용) ]


오늘의 서촌이 답해야 할 물음은 여기에 있다. 보존과 복원이 개발의 다른 이름으로 돌아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 않는 것들을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으로 새로 만들어 세우는데 급급한 지금,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숨결은 숨결 그대로 이어가는 노력과 자세에 대한 것 말이다.


과거의 발걸음이 오늘의 발걸음으로 이어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있는 역사와 살아있는 문화유산을 누릴 자격을 가지게 되는 건 아닐까. 서촌을 수놓은 수많은 이름과 이야기들이 서로 만나고 교차하는 누하동 오거리에 오늘의 삶 역시 교차하고 있는 것 처럼, 시간의 교차로 누하동 오거리는 예전과 같이, 오늘도 여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쓰여지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참고문헌

  1. 연암집(燕巖集) 제8권 별집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연도미상 (한국고전종합DB)
  2. 천경자, 思友 잊을수 없는 그때 그친구 <16> 千鏡子 <東洋畵家> (6) 萬年청년 韓默씨, 경향신문, 1979.10.3.
  3. 김창희, 서촌의 형제들이 꾸었던 꿈 진보적 민족주의자의 길 - 1, 레디앙, 2013.4.23.


통인시장에서 수성동계곡을 잇는 옥인길을 걷다가 가슴이 철렁한 장면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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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9498 by Kim Hanwool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3층 바닥면에 있던 콘크리트가 녹슨 철근이 팽창하며 생긴 균열로 인해 공중에 매달려있다가 한꺼번에 떨어져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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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9500 by Kim Hanwool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건물 바로 앞에서 올려다 본 모습은 더욱 아찔하다. 건드리지 않아도 후두둑 떨어져 내린 콘크리트 덩어리들이니 아직 미처 떨어지지 못하고 옆에 불안하게 붙어있는 콘크리트 덩어리들은 또 언제 떨어질지 모를 일이다.


오가는 사람이 없는 때에 무너져 내려서 인명피해는 없는 것으로 보여 그나마 다행이었다. 더군다나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떨어진 바로 옆으로는 아이들이 오가는 출입구가 배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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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9502 by Kim Hanwool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노후건물이 많은데다 체계적인 노후건물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서촌의 특성 상 위태위태한 건물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한옥의 경우 큰 비가 쏟아질 때에 지붕이 주저앉는 경우는 최근 몇 년 간 해마다 두 세 건 씩 일어나곤 했을 정도다.


하지만 한옥에 비해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들은 노후건물 문제가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되지 않고 있는 듯 하다. 한국일보, SBS, tbs 등 언론에서 서촌의 노후건물을 취재할 때에도 늘 관심은 한옥에만 맞춰져 있었고 한옥 외의 건물이 언급된 경우는 예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니 일반의 관심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예에서 보듯 대부분 복층 구조를 가진 콘크리트 건물의 노후에 따른 문제는 단지 구조안전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는다. 건물관리를 꼼꼼히 하는 건물주가 드문 풍토에서 철근 부식으로 인한 콘크리트 박리나 외장재의 이탈 추락으로 인한 인명피해의 가능성은 서촌에서 만큼은 가능성 수준이 아닌 현실적인 위협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지난 겨울, 통인시장 동측 입구에 있는 효자아파트(통인아파트) 입구 5층 외벽에 붙어있던 대리석이 새벽4시 경 추락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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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IMG_5403 by Kim Hanwool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 사진은 대리석 외장재 한 장이 추락한 후에 건물 꼭대기를 두른 대리석을 모두 제거하고 콘크리트를 바른 모습. 하지만 다른 외장재들은 안전하게 붙어있는 것인지 확인조차 되지 않고 있어 아파트 거주민은 물론 시장 통행인의 보행안전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바닥에 깨져있는 두꺼운 대리석 조각이 5층 꼭대기에서 떨어져 산산조각났으니 한동안 돌 부스러기라도 또 떨어지지 않은까 노심초사하며 건물 입구를 드나들 수 밖에 없었지만, 잠시 길을 오가는 이들로서 이러한 문제를 알기도 어렵고 대책을 요구하고 방안을 마련하는 일은 더더욱 요원할 수 밖에 없다.


결국 건물 관리 책임을 가지고 있는 이가 책임의식으로 가지고 안전 문제를 신경쓰고 노후건물을 관리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있지 않고서는 어느 순간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콘크리트 덩어리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의 지원이나 대책이라는 것은 한옥지원금 지급이나 지난해 구청에서 효자아파트(통인아파트)에 도색비용을 지원한 것이 고작이다. 거주민의 주거안정과 주거안전을 먼저 살펴보고 그 후에 잘 정돈되고 꾸며진 외관을 챙기는 것이 순서일텐데, 안전 문제 보다는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에만 신경쓰는 듯 하여 씁쓸하기만 하다.



대중들은 분노하지만 정작 투표일은 잊어

.. 사람들이 나쁘다고 정치인은 말하지

마피아는 늘어나 더러워지는 강물처럼

.. 또 넌 내게 말하지 그게 세상이라고

.. 들리는 건 온통 체제의 블루스

.. 이 체제는 곧 무너질거야, 성난 젊음의 노래로 ..


THIS IS NOT A SONG IT'S AN OUTBURST: OR THE ESTABLISHMENT BLUES 


- Sixto Rodriguez


The mayor hides the crime rate, council woman hesitates 

Public gets irate but forget the vote date 

Weatherman complaining, predicted sun, it's raining 

Everyone's protesting, boyfriend keeps suggesting 

you're not like all of the rest


Garbage ain't collected, women ain't protected

Politicians using, people they're abusing

The mafia's getting bigger, like pollution in the river

And you tell me that this is where it's at


Woke up this morning with an ache in my head

I splashed on my clothes as I spilled out of bed 

I opened the window to listen to the news 

But all I heard was the Establishment's Blues.


Gun sales are soaring, housewives find life boring

Divorce the only answer smoking causes cancer

This system's gonna fall soon, to an angry young tune 

And that's a concrete cold fact


The pope digs population, freedom from taxation

Teeny Bops are uptight, drinking at a stoplight

Miniskirt is flirting I can't stop so I'm hurting

Spinster sells her hopeless chest


Adultery plays the kitchen, bigot cops non-fiction

The little man gets shafted, sons and monies drafted

Living by a time piece, new war in the Far East

Can you pass the Rorschach test?


It's a hassle it's an educated guess.

Well, frankly I couldn't care less.



Tchaikovsky String Quartet No.1 in D - Mvt 2 (Andante cantabile) - Borodin Quartet


틀어놓은 음악 중에 귀가 번쩍 뜨여 곡명을 확인하게 만들었던 곡이다.


이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린 한 사람에게 차이코프스키는 영광스러워했다고 하는데

눈물을 흘린 사람의 이름은 다름 아닌 톨스토이였다.


차이코프스키는 창 밖에서 들려오는 어느 인부의 휘파람소리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그 휘파람 선율은 남러시아의 민요였다고 하는데, 그 민요의 제목은 <Сидел Ваня на диване>(Vanya sat on the couch, 소파에 앉은 바냐)이다.


* 한글 문서의 경우 대부분 '와냐'라고 적고 있지만, '바냐'로 옮겨적은 것이 옳은 듯 하다.



가사는 아름다운 소녀 바냐에게 한 눈에 반해버린 이반을 노래한다.


Сидел Ваня на диване,
Чай последний допивал,

Сидел Ваня на диване,
Чай последний допивал,

Не допивши полстакана,
Сам за девицей пошол.

— Ты девица-красавица,
Обьясни свою любовь,

— Ты девица-красавица,
Обьясни свою любовь,

Я любить тебя три года,
За прелестну красоту!

Я любить тебя три года,
За прелестну красоту!

А теперь любить не стану
На квказ служить пойду!


* 민요 음원은 아래 링크를 통해서도 들을 수 있다.
http://video.yandex.ru/users/baranchic-gav/view/11

개발의 뒤안에서 시간을 퇴적해온 도시,  서촌


비 오는 아침과 눈 내리는 낮, 저녁의 석양과 새벽의 달빛, 이같이 그윽한 삶의 신선 같은 정취를 바깥세상 사람들에게 말해주기 어렵고, 말해주어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서촌 1. 역사 경관 도시조직의 변화, 서울역사박물관, 2010).


중인 신분으로 조선 후기를 살았던 학자 장혼이 글로 남긴 인왕산 아래의 동네 풍경은 지금의 것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대로이다. 인왕산과 경복궁 사이에 자리 잡은 서촌은 오래된 동네다. 장혼이 태어나던 무렵에 제작된 도성대지도를 펼쳐 보아도 지금의 골목길과 견주어 길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길의 모양이 그대로라면 땅의 모양도 크게 바뀌는 일 없이 전해 내려왔으리라 추측해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전문 기술직이 많았던 중인 계급이 주로 터를 잡고 살던 동네라 다닥다닥 처마가 맞닿은 필지의 크기도 작은 편이다. 개발이 온 나라를 휩쓸던 때에는 오히려 청와대 근처라는 이유로 개발에서 소외되어 우연히도 옛 모습을 보존하게 되었다. 인왕산 비탈에서 내려다보면 시내의 높은 건물들이 일제히 고개를 떨어뜨리는 곳,  낮은 주택들이 모여 있는 사대문 안에 몇 안 되는 오래된 주거지가 바로 서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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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서촌 전경 · 김한울 찍음 / _IMG_0084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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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서촌 전경 · 김한울 찍음 / _IMG_8202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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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서촌 전경 · 김한울 찍음 / _IMG_1255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에 약속된 아파트 재개발은 개발 제한으로 낙후된 동네가 불만이었던 주민들에게는 장밋빛 미래였지만, 오랜 시간을 이어온 동네의 모습에 애착을 가진 주민들에게는 위기이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서울시의 북촌 한옥보존 정책이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서촌도 한옥 보존으로 방향을 선회하며 옛 모습을 유지한 채 낙후한 환경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정도 600년을 외치지만 어느 하나 수백 년을 헤아리는 것이 변변치 않은 서울에서 최소한 300년은 족히 넘게 이어온 골목길을 품고 있는 일반 주거지가 어떤 의미일까를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지켜낸 일은 천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동네 주민들이  ‘동네’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다

그렇다고 모든 걱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땅을 깎아 시간의 켜를 들어내고 콘크리트를 퍼부어대는 참극은 면했다지만, 옛 효자동 전차종점을 같이 써오던 이웃 동네 북촌과 삼청동이 불과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다른 세상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잠시 쓰레기봉투라도 내놓으려 대문을 열어도 큼직한 카메라를 든 외지인들과 눈을 마주치게 되는 일이 예사라면 정든 동네라도 견디기 쉬운 일은 아니다. 견디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는 북촌과 삼청동 이웃을 지켜본 서촌 주민들은 동네에 새로 들어서는 카페 하나도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낡은 집들을 헐고 아파트를 지어 올리는 재개발이 아닌, 나고 자란 삶의 터전을 가벼운 구경거리로 전락시켜 토착민들을 쫓아내는 새로운 종류의 재개발이 등장한 셈이다. 게다가 서울시의 한옥보존 정책이 무색하게도,  구청은 단층 한옥 바로 옆으로 고도제한 20미터에 맞추어 7층 건물 신축을 허가하는 상황까지 반복되고 있다.  최악은 면했지만 차악도 최악 못지않은 것이다.


서로 지나며 인사하던 이웃들 사이에 걱정이 오가고 여기에 공감하는 이웃들이 늘어나면서 함께 모여서 얘기해보자는 제안이 나왔다. 모임 날짜가 정해지고, 알음알음 함께 걱정할 수 있는 이웃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모이는 자리도 옛 재개발 추진위 사무실 자리에 새로 문을 연 카페로 정해졌다. 그렇게 첫 자리가 만들어지고 혼자 혹은 둘이 하던 생각과 이야기들을 여럿이 공유하면서 모임을 결성하는 데에까지 뜻을 모으게 됐다. 처음 모인 지 한 달 만인 2011년 6월 5일, 조촐하게나마 창립총회를 통해 회칙을 채택하고 임원을 선출하면서 시작된 것이 지금의 ‘서촌주거공간연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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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최근 서촌에 생기는 높은 건물들 · 김한울 찍음 / _IMG_1485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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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최근 서촌에 생기는 높은 건물들 · 김한울 찍음 / _IMG_1504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서촌주거공간연구회

우선 모임을 시작하게 된, 건물 신축 문제부터 풀어보고자 했다. 문제는 쉽지 않았다.  여러모로 대책을 찾아봤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구청의 소극적인 자세가 바뀌지 않는 한 상황이 변화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한옥보존 정책과의 괴리 문제, 도시 경관의 문제 등의 이야기는 이미 처음부터 소용없는 것이었다. 사이좋게 옹기종기 모여 있던 지붕들은 높은 건물 발치에 엎드린 듯 납작하게 붙어 있는 모양이 되고 말았다.


이웃의 풍경이 동네에 대한 애착의 밑거름이 되고, 그러한 삶의 환경을 지키며 살아가고 싶은 희망이 ‘건축법상 하자 없음’이라는 한마디로 더 이상 변호될 수 없는 상황에서 서촌주거공간연구회(약칭 ‘서주연’)는 동네의 가치를 변호하고 지켜낼 수 있는 내용과 실천을 고민하기로 했다. 또한 각각의 집과 가정이 아니라 그 개개가 함께 모여 이루어진 동네로서, 서로가 서로에 기대어 있는 삶의 공동체로서 마을을 인식하고 가꾸어나가는 것이 개개의 주민에게도 중요한 가치를 제공한다는 공감대 속에서 동네의 가치를 발굴하고 일구어나가는 데 뜻을 모았다.


처음과 같이 2주 간격으로 모임을 꾸준히 이어나가는 것은 자연스럽게 원칙처럼 자리 잡혔고, 모임이 열리는 장소는 마침 동네에 사무실을 두고 있던 시민단체에서 제공해주기로 했다. 동네 주민들이 모이는 모임인 만큼 다른 약속이 없는 일요일 저녁 시간이 회의 시간으로 고정됐고, 정기적인 모임을 카페 등에서 전전하는 것에 비해 휴일 저녁의 빈 사무실을 활용하는 것이 맞춤했다. 동네 커뮤니티 활성화를 위해 주민들에게 조건 없이 열려 있는 커뮤니티 공간의 안정적 공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얼마 되지 않는 모임의 경험으로도 충분히 체감할 수 있었다.


함께 나누는 시간과 이야기가 많아져야

안정적인 모임 장소가 제공되는 가운데, 활동의 범위도 천천히 늘어갔다. 철거를 앞둔 한옥을 지키기 위한 활동이 그 뒤를 이었고, 겸재 정선의 그림을 토대로 복원한다던 ‘수성동 계곡’에 엉뚱하게도 축대를 쌓아올리고 있는 현장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냈다. 육아 환경에 대한 고민이 막 시작되던 때에는 마침 동네의 어린이집 중 한 곳에 문제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상황에 도움이 되고자 머리를 맞댔다. 과정에서 서울시의 국공립 어린이집 확대가 숫자 늘리기에 급급한 채 얼마나 졸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나기도 했다. 정기적으로 동네 골목을 청소하러 다니고, 동네를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구경거리로 좋은 동네가 아니라 다양한 삶과 시간의 향기가 스민 채 역사와 삶이 공존하는 공간으로서의 동네 골목길을 안내하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주제를 접하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저마다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다르게 피부에 와 닿던 삶의 문제가 하나하나 마치 나의 문제처럼 절실하게 다가오는 경험은 동네 모임의 활동을 통해 회원들 사이에 공유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소문으로만 듣고 흘리던 일들, 동네를 지나면서 머릿속으로만 되뇌던 물음표로 끝났을 이야기들이 모임을 통해 이야기 나누어지고, 의견을 모아 행동으로 이어나가는 과정을 통해 동네는 좀 더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결국, 동네가 살기 좋아진다는 것은 관에서 예산을 많이 투여하는 동네나 낡은 집을 허물고 새 집을 말끔히 지어 올린 동네가 아니라,  그 동네에 살고 있는 이들 스스로가 자신의 동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관심을 기울이며 서로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는, 어찌 보면 당연한 진실을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깨닫게 된 셈이다.


낡은 인식과 자세는 큰 장애

어려운 점도 적지 않다. 모임에 참여하는 주민의 수와 활동의 빈도가 늘어나면서 휴일 저녁의 빈 사무실로는 공간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점이나 주민단체를 대하는 구청의 관료적이고 비협조적인 태도 등은 언젠가 풀어야 할 어려운 숙제로 남겨져 있다. 게다가 관에서는 북촌과 삼청동을 바라보는 서촌 주민들의 우려스러운 눈빛은 아랑곳없이 날로 관심이 집중되는 서촌에 대해 관광지 개발의 관점으로만 접근하며 새로운 것, 근사한 것으로 옛것을 대체하는 사업만 남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저마다 사는 사람이 자유롭게 부르면 그만인 동네 이름을 굳이 ‘세종마을’이라 새로 지어 붙이고선 ‘서촌 금지령’까지 내리는가 하면, 조선시대부터 시작되어  ‘내자시장’  등으로 불려왔던  ‘금천교시장’이란 이름도 제 마음대로 ‘세종마을음식문화의 거리’라는 새 이름으로 바꿔 붙이고 있다. 주민들이 부르는 동네 이름을 지우려는 관의 행태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주민으로서 열심히 의견을 모아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여전히 경직된 자세를 버리지 못하는 행정이 결국 마을의 진화에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동네란,  마을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불쑥 살고 있는 동네의 의미를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2년 만에 돌아오는 임대차 계약 만료 때마다 고민에 빠지는 보통 사람들에게 동네는 집값과 통근 거리에 따라 정해지는 것 정도이지 않을까? 이사 갈 곳을 찾다 보면, 도시는 어느새 시간과 비용의 공식에 따라 모든 것이 정해지도록 프로그램된 거대한 기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부동산에 있어서 시장경제가 실현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어느 한 곳에 정주하는 삶을 누릴 권리나 동네를 선택한 권리는 집값 혹은 보증금이라 이름 붙여진,  경제적 여유만큼만 주어지는 것이니 말하자면 가격표가 붙어 있는 권리인 셈이다.


도시를 떠도는 삶에서 동네를 고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동네를 가꾸는 일에 힘을 보태고 있는 처지에서도 날로 높아가는 임대료는 또다시 언젠가 정 붙인 이 동네를 떠나야 하는 현실로 내게 닥쳐올 가능성이 높다. 때가 되면 떠나야 하는 세입자로서 일부러 동네에 정 붙이지 않는다는 누군가의 말이 다시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어쩌면 이러한 악순환 속에서 우리는 동네를 잊고 살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정주의 권리를 매매의 대상이 아닌 기본적인 인권의 차원에서 들여다보고 고민해봐야 한다.


마치 유목민처럼 때가 되면 떠나야 하는 도시민들의 삶에서 ‘동네’는 사치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도시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으려면 다시 ‘동네’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동네를 재발견하고 이야기하며 동네의 가치를 힘써 끌어올리지 않는 한, 시간이 돌아오면 땅에 박힌 뿌리를 스스로 뽑아내어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하는 끝없는 이주의 삶을 얼마나 더 반복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누하동 181번지에는 청전화숙과 함께 청전 이상범 화백의 집이 보존되어 있다. 청전 이상범 화백은 1928년, 조선일보에서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겨 삽화를 그렸는데, 1936년 손기정 옹의 마라톤 금메달 보도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경찰에 잡혀갔다가 풀려난 후 동아일보를 그만두게 된다.


청전 화백이 동아일보에 재직하던 때인 1935년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소설인 <흑두건(黑頭巾)>에도 청전의 삽화가 들어있는데, 그 중에 1935년 2월 9일자 220회 연재에서는 서울 지리, 그 중에서도 서촌에 대한 재미있는 내용이 있어 소개한다.


黑頭巾 <220> - 동아일보(1935.2.9.)

윤백남(尹白南) 작

이청전(李靑田) 화


강항은 동대문박 복차다리께서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야 야주현에 이르기까지에 수없이 술을 사서 먹엇다.

억병같이 취한강은 무슨 생각이 낫던지 야주현에서 위대로 가는 길로 드러섯다.

거기서부터 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어디를 어떠케 헤매고 돌아다니엇던지 그는 금충교 대리에 와서 씨러지고 말엇다.

인적이 끄닌 금충교 돌다리 위에서 그는 업드러진 그 자세대로 인사불성에 빠지고 말엇다.

...(중략)...

그러나 치위보다 더 그를 괴롭게한것은 갈ㅅ증이엇다.

목은 말러부터서 기침을 할 대 마닥 앞엇다. 그리고 입에는 침 한 점이 없어서 혀가 맘대로 돌지 안는다.

이 개천물이 만일에 훨씬 상류이엇더면 그는 의당 개천물이라도 손으로 훔켜서 목을 축엿을것이지마는 금충교 개천은 수채나 다름없는 더러운 물이라 아무리 갈ㅅ증이 심하다 하드라도 차마하니 그 물을 마실 수는 없었다.


인용된 부분에 나오는 지명을 살펴보자면, '복차다리'는 현재의 창신동으로 대략 동대문역과 동묘앞 역 사이 쯤이 되고, 야주현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뒷쪽 당주동 일대를 일컫는다고 한다.


강항이라는 주인공은 동대문에서부터 술을 이어마시며 걷다가 결국 야주현에서 위대로 들어가는 길에 들어선다. 위대는 '웃대'라고도 하는데, 소설에 표기된 것으로 보아 30년대 당시에는 '웃대' 보다는 '위대'라는 발음이 더 일반적이었던 듯 하다. 혹은 30년대 당시 조선시대의 지명을 고증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당주동에서 위대로 접어드는 길이라면 세종문화회관 뒤에서 종교교회 앞을 지나 경복궁역으로 향하는 북서방향의 길이 되는 셈인데, 결국 주인공은 지금의 경복궁역인 금천교 돌다리에 이르러 정신을 잃고 만다.


지금은 '금천교시장'이라는 이름이 가장 흔히 불리는 이름이고, 얼마 전부터는 고약하게도 종로구청에서 '세종마을음식문화의 거리'라는 생뚱맞은 이름을 붙여버리기도 했지만, 예전 신문기사를 찾다보면 '금충교'라고 부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금천교는 1928년에 일제가 길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헐려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흑두건이라는 소설의 배경이 금천교가 헐리기 한참 전인 조선 광해군 때인 탓인 듯 하다.


이 금천교 아래로 흐르는 물은 주인공 강항이 걸어왔던 길을 따라 세종문화회관 뒤를 지나 광화문네거리를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는데, 소설에도 나타나듯 지금의 수성동계곡이 있는 옥류동천 상류나 북악산에서 발원하는 백운동천 상류는 제법 맑은 물이 있어서 빨래터 등이 설치되어 있기도 했다.

참고로 흑두건은 30년대 이후 여러차례 단행본으로 출판된 바 있으며, 작자인 윤백남(1888~1954)은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으로 조선 최초의 희곡을 쓴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의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라고 하면 누구나 알겠지만, 최승희에 무용을 권하고 후에는 최승희의 자서전을 대필하여 출판한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최승일은 서울 출생으로 배재 출신으로 동경일본대학으로 유학을 다녀와 1922년에는 소설 〈상록수〉의 심훈과 함께 염군사(焰群社)에 가담하기도 했던 조선 예술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경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가 서촌과도 인연이 있는 것은 어찌보면 싱거운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또한 각별히 언급될 만 한 장소가 있는 탓에 무심히 지나칠 일도 아닌 듯 하여 자료를 찾아보았다.


동경일본대학 미학과에서 돌아 온 최승일(崔承一)은 대표적으로 북풍회(北風會), 경성청년회(京城靑年會),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프로예맹) 등에서 활동했으며, 그가 활동한 중에 '극문회(劇文會)'와 '라디오극연구회'는 지금의 서촌에 해당하는 사직동과 체부동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중 극문회는 경성으로 돌아온 최승일의 이름이 처음 나오는 계기가 되는데, 처음부터 연극 연구와 강연, 잡지발행 등을 통해 조선의 연극을 개량코자 조직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진취적인 활동을 펼쳐나갔을지, 짐작하게 되는 바가 있다.



劇文會創立 - 동아일보(1922.4.5)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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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동 187번지에서 극문회를 시작하고 2년 반 여가 지난 후인 1924년 12월 11일에는 프로(professional 아닌 prolétariat 의미) 작가와 미술가들 50여명 등이 함께 『경성청년(京城靑年)』을 창립하여 청년총동맹(靑年總同盟)에 가입하기로 결의한다. 여기에서 선출된 13인의 집행위원 명단에서도 최승일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京城靑年』發會 - 동아일보(1924.12.13)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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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경성청년회를 살펴보자면, 경성청년회는 사무실을 재동 84번지에 두었는데, 이 곳은 현재 현대 계동 사옥 서쪽 일대로 현재 84번지는 40여개의 필지로 쪼개어져 있다.


창립 총회 때에 집행위원에 위임한 강령과 사업안을 다음 해 3월 신문지상을 통해 발표한 바 있는데, 그 내용이 당시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있어, 현대어로 바꾸어 옮겨본다.




식민 경성에서 워낙 활발한 활동을 하던 최승일인 만큼, 여기서는 1926년 결성한 '라디오극연구회'만 다룬다. 최승일은 라디오극연구회를 통해 시험 방송을 주도하다가, 경성방송 개국 후에는 방송극을 연출하며 조선 최초의 방송 프로듀서가 되었다. 당연히도 이 때에 최승일이 연출한 방송극은 조선 최초의 방송극이다. 또한 그의 아내 마현경은 경성방송 첫 공채 아나운서로 그 전까지 진행을 맡던 이옥경 아나운서와 함께 조선 최초의 아나운서이기도 하다.


경성방송국 개국 전의 최승일이 이끌던 라디오극연구회의 주소는 체부동 137번지이다. 



라듸오劇硏究會創立 - 동아일보(1926.6.27)


기사는 '이달 그믐께'(1926년 7월 초순)에 체부동 137번지에서 최승희 원작 이경손 각색의 단막극 <파멸(破滅)>을 공개 시험할 예정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1925년 6월 무렵부터 시험방송을 했다고는 하지만, 아나운서가 없어 기술국 직원이 번갈아 아나운서 역할을 해오다가 1927년 2월 16일에야 경성방송국의 첫 전파가 송출되었다고 하니, 어쩌면 이 때 공개 시험으로 진행 된 <파멸>은 조선 최초의 라디오극으로 쓰여진 작품이지 않았을까. 경성방송국은 조선중앙방송국과 한국방송(KBS)의 전신이다.

서촌에 한 번 쯤 와봤다면 들르는 체부동의 토속촌삼계탕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다녀간 집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후로 손님의 매해 늘어 이제는 일곱 채의 한옥을 식당으로 쓰고 주변의 빌라를 조리실 및 숙소 용도로 매입하는데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주차장도 부족하여 골목 건너편의 집들을 매입해서 지난 1년 사이에 가옥을 모두 철거하고 주차장으로 만들었는데 체부동 137번지 가옥이 이 때에 헐려나가고 말았다. [ 다음로드뷰로 보기 ]


최승일의 극문회가 자리잡은 사직동 187번지도 언제 사라졌는지 현재는 광화문풍림스페이스본 106동 서쪽 골목 어귀에 187-1이라는 지번만 남아있다. [ 다음로드뷰로 보기 ]


마지막에서 밝히자면 이 포스팅은 70년대 초중반에 걸쳐 체부동 138번지에 거주하셨던 분의 말씀을 따라 혹시나 관련한 역사가 있는지 찾아보던 중, 체부동 137번지에 대한 kurtnam 님의 포스팅 [ 기록에 관한 기록 ]을 찾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삼계탕집 주차장 부지에서 드러나는 철거된 역사에 대한 아쉬움은 역사의 기록과 그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그 망각에 대한 형벌이란 이처럼 무섭도록 정직하게 내려지고 만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현재 경복궁역 사거리에서 '자하문터널'로 이어져 세검정로에 닿는 길을 '자하문로'라고 하고, 궁정동에서 북악산 허리를 타고 올라 창의문(자하문)과 '윤동주 시인의 언덕' 사이로 백악과 인왕을 잇는 능선을 넘어 부암동 주민센터로 닿는 길을 '창의문로'라고 합니다.


하지만 자하문로는 '자하문길'로 불린 시간도 만만치 않습니다. 1986년에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길 이름을 '자하문길'로 명명하기도 했지만, 언론 보도에서는 1984년부터 '자하문길'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기도 하니까요.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이 길의 이름을 '자하문길'로 명명한 것은 공사 완공을 한달여 앞둔 86년 7월 말이었습니다. 



청운동~세검정路 「자하문길」로 名命 - 경향신문(1986.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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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마무리 공사중인 청운동~세검정간 도로(너비 25~29m, 길이 1,590m) 이름을 「자하문길」로 의결하였다는 기사입니다. 1984년 신문보도로 공사계획이 보도될 때에는 '청운쌍굴'로도 표기됐던 자하문터널도 이 때에 함께 지금의 이름을 얻습니다. 



清雲(청운)·平倉(평창)동일대 아파트·빌라團地(단지)로 단장 - 경향신문(1984.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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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는 기존 도로의 확장과 직선화, 터널 개통, 주택조성으로 진행됐습니다. 지면에 게재된 계발계획도 중 자하문로와 관련된 부분만 살펴보면 현재의 자하문터널 남쪽 입구에서부터 610m 길이의 도로를 신설, 확장하는 사업으로 진행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간의 길이를 현재의 지도에 적용해보면, 지금의 터널 남측 입구에서부터 경기상고 정문 앞까지가 신설구간, 경기상고 정문 앞부터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까지가 확장구간에 해당함을 알 수 있습니다.




지도에 표시된 구간 아래로 지금의 경복궁역 사거리로 이어지는 길은 '추사로', '궁정로' 등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 길은 정부 발표를 인용한 언론 보도에서는 통상 '적선동107~궁정동13'(혹은 '적선동107~청운동108') 구간으로 표기되었습니다.



內資洞~청운國校 도로 1.6km 확장 준공
- 동아일보(1978.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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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한 가운데 넓게 펼쳐진 자하문로의 모습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착공이 같은 해 6월이니 폭 40m의 도로로 확장하기 위해 사유지 306필지(6,335평)를 수용하고 건물 141동(5,918평)을 철거하는데에 불과 반년 밖에 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문은 1990년 8월 철거된 내자호텔부터 청운국교 사이의 1.6km도로라고 적고 있는데, 이 때문에 자료를 검색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같은 길을 두고 기사 마다 '적선동107~궁정동13'이나 '내자동~청운국교' 등으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으니, 자하문로에 관한 내용을 찾으려면 우선 길을 일컬을 때 쓸 수 있는 모든 단어를 꼽아봐야 하는데다, 단어의 조합이 많아지는 만큼 정확한 정보를 찾아내기까지의 검색 시간도 길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한 번 정해놓고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 역사를 복기하고 시간을 되살리는 데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시 한 번 환기하게 됩니다. 


자하문길은 아마도 김대중 정권 당시 길이름을 종횡에 따라 구분하면서 지금의 이름인 '자하문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누하동 오거리에서 체부동 골목으로 접어들면 라파엘의 집 뒤편을 지나 길이 굽으며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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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부동 107번지 건물 전면 / _IMG_0422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잠시 멈춰 가만히 살펴보면 처음부터 사람이 살기 위해 지어진 집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다른 사연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열린 문 안쪽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면 햇볕도 잘 들지 않는 좁다란 복도를 따라 다닥다닥 방문이 줄지어 있는 풍경이 나타납니다.


쓰레기 배출에 대한 주의문구가 붙어있는 것을 보면 여러 사람이 살고 있는 다가구 주택임을 알 수 있지만, 문 간격으로 봐서는 쪽방촌을 연상케 합니다.


이런 건물은 흔하지는 않지만 잘 살펴보고 다니면 또 의외로 눈에 띠는 종류의 건물인데, 짐작에는 공장이거나 공원(工員)들을 위한 숙소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몇 걸음 물러서서 보면 앞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게 제법 길쭉하게 자리잡고 있는 건물임을 알 수 있는데요. 짐작에 힘이 실리는 대목이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처음부터 사람이 거주 할 목적으로 지은 건물이 이렇게 길쭉한 형태에 실내는 어두침침하게 지어지지는 않으니까요. 게다가 밖으로 나있는 창도 그리 친철해보이지는 않습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동네의 곳곳을 안내하고 설명하기도 했지만, 이 건물에 대한 궁금증은 좀처럼 해결 할 기회를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발견한 옛 신문 기사가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네요.



都心(鍾路·中區)공장 모두 移轉 - 경향신문(1978.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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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1978년 3월 23일, 종로구와 중구 등 도심지역의 공장을 1980년까지 모두 변두리나 지방으로 이전하는 방침을 확정하여 발표했습니다. 이 때에 이전 명령을 받은 업소 중에는 '태화두부 공장'과 '태성두부'라는 곳이 있는데 체부동 107번지와 통의동 118번지에 각각 소재했다고 합니다.


서울시에서는 도심 인구 과밀 해소를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기사에서 지적하고 있다시피 영세한 공장들을 지방으로 옮기면 직원들의 통근만 불편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직원 통근 문제 뿐만 아니라, 생산과 소비가 인접할수록 편리한 생필품의 경우에는 '직주근접(職住近接)의 원칙'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에 비추어도 당시 서울시가 밝힌 공장 이전의 이유가 쉽게 납득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이 건물을 보면 공장이 이전되고 나서 직원들은 멀리 떠났을 지는 몰라도 작은 방들이 줄지어 들어서 오히려 도심 인구는 늘어나는 셈이 된 듯 합니다.


'태화두부 공장'과 달리 '태성두부'가 자리하던 통의동 118번지는 포털 지도서비스에서 지번이 나타나지 않는데, 인근 번지를 보아서는 옛 '커피즐겨찾기' 근처로 1978년 6월 자하문로 확장 공사가 착공되면서 철거되고 지금은 길 위에 어디 쯤으로 남게 된 듯 합니다.


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도 골목 어귀에는 두부공장이 있었는데, 뚝딱거리던 소리와 펄펄나던 김이 무척이나 활력있어 보였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때 그 두부공장도 체부동 107번지 건물과 닮았던 듯 하네요.


혹시 지금도 주거지 가운데에 남아서 두부를 만들고 있는 두부공장이 있을까요? 동네 슈퍼를 가더라도 브랜드 로고가 선명한 두부들 사이에 고군분투하는 전국구 두부 브랜드들 밖에 볼 수 없는 지금에, 동네 두부공장과 저녁시간이면 딸랑대던 두부 아저씨 생각이 다시 납니다.



지도를 클릭하시면 위치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서울성곽,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오늘로부터 정확히 3년 전인 2009년 9월 4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유네스코의 자문기관인 이코모스(ICOMOS,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관계자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모인 가운데 국제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서울성곽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겠다는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의 의지를 천명한 가운데 열린 심포지엄이었다.


그 후, 오세훈 서울시장이 사임하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취임하였지만 서울성곽 복원 및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만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 1월 31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성곽 순성을 하며 현장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시민이 최우선임을 강조하며 형식적인 복원은 없을 것이라 한 것 정도가 변화라면 변화였다고 할 수 있다.


박원순, "형식적인 서울 성곽복원 없다" - 서울문화투데이 (2012.1.31.)


성곽 구간에 따라서는 기존의 험준한 바위지형을 성벽 삼아 인공적인 성곽 축조를 생략한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재의 성곽 복원은 기존의 구간과 형태에 대한 고증이 얼마나 정확히 된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왕산 정상부까지 복원이 완료되는 등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다.


서울성곽 복원의 현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하지만 서촌에서의 일상에서 바라보게 되는 풍경 중에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추진되고 있는 서울성곽 복원이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도 있다. 서울성곽 복원이 그저 고개를 끄덕일 일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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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능선 너머로 북한산이 보이는 자하문로 풍경 / _IMG_3289 by redslmd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태풍이 지나가고 비교적 청명하던 날씨에 북악산 서쪽 능선으로 구름 그림자가 져있다. 자세히 보면 북악산 녹지선이 수평에 가깝게 자연스럽게 이어지다가 화면 가운데에서 갑자기 움푹 패여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누런 흙과 파란색 유실방지 덮개가 도드라지는 곳이 현재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현장이다.


북악산은 14세기 말 조선이 건국된 후, 한양이 새로운 도읍으로 정해지는 과정에서 풍수지리 상 주산이 된 산이다. 바로 이 북악산을 중심으로 동쪽의 좌청룡이 대학로 뒷편의 낙산이고, 서쪽의 우백호가 서촌을 감싸고 있는 인왕산이며, 주산을 마주한 목멱산이 남산이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북악산은 백악산이라는 옛 이름으로 명승 67호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위의 사진을 부분 확대한 사진이다. 사진 가운데로 펜스가 쳐진 가운데 흙이 파헤쳐진 모습이 보인다. 궁정동에서 창의문로를 따라 자하문으로 올라가는 길의 오른편에 위치한 문제의 공사현장이다. 빌딩 창문 밖으로 북악산이 보이는 정동의 빌딩 창가에서도 눈엣가시처럼 시야를 괴롭히는 이 현자은 다름아닌 군부대 막사 신축 공사 현장이다. 언론 보도를 잠시 살펴보자.


환경단체 “북악산 군 막사, 명산·유산 훼손” - 경향신문 (2012.02.09.)



복원의 가면을 쓴 개발의 그림자

북악산에 군 막사를 신축하는 것과 서울성곽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의 관련은 보도에도 나와있다시피 막사 신축에 대한 수도방위사령부 측의 설명에서 발견된다. 옛 막사가 성곽과 가까운 까닭에 최대한 먼 곳에 신축하고 있는 것이라는 설명이 그것이다.


서울 성곽을 복원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다는 것은 600년 도읍인 서울의 역사를 알리고 자부심을 갖자는 뜻으로 읽힌다. 하지만, 그 성곽이 둘러싸고 있는 정작 중요한 도읍 자체의 경관은 성곽 복원 사업으로 인해 훼손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이 공사현장은 서울환경운동연합과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등 여러 전문성 있는 시민단체의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꾸준히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서울성곽의 '복원'이 또다른 얼굴의 '개발'로 다가오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증거인 셈이다.


복원을 하더라도 개발을 수반할 수 밖에 없는 개발주도형 복원이 우리 사회의 한계인 것일까. 매일같이 올려다보게 되는 북악산 군 막사 신축 현장을 보며 되새기게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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